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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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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 서기지부 교선부장

난 7월 29일 서울도시철도노동조합(도시철도노조) 10대 위원장으로 기호 3번 허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2년에도 위원장을 역임한 허인 후보는 민주노총 공공연맹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도시철도노조 민주파의 핵심으로 꼽힌다.

허인 후보 측은 선거결과에 대해 “前 집행부의 협상과 성과 위주의 실리주의적 노선에 실증을 느낀 대다수의 조합원들이 투쟁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적 노선을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며 “하반기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사측이 강제해고를 진행하려는 것에 조합원들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2008년 도시철도노조의 하원준 前 위원장은 인력감축과 구조조정 안에 대하여 합의를 한 바가 있다.

아래는 올해 새롭게 선출된 도시철도노조의 10대 집행부의 김정섭 정책실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선거모토 “물러설 수 없다. 더불어 함께 살자”에서 볼 수 있듯이, 무엇보다도 조합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구조조정 아닌가?

나이 먹었다고 희망퇴직으로 밀어내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사는 현장을 만들 것이다. 연말에 또 인원감축과 희망퇴직이 예고되고 있다. 조합원들에게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Q.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투표율 제일 낮은 4개 사업소장은 각오하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후보들에 대한 노골적인 압박 같은 것은 없었는가?

그런 건 없었다(웃음). 당시 현직 집행부이면서 공사의 지원을 입었던 집행부가 1차에 떨어졌던 주된 이유는 작년 노사합의를 통해 희망퇴직을 수용했던 점 때문이다. 올해 5월 아침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직원 3,000명을 모아놓고 진행한 노사합동 비젼선포식은 노골화된 노사협조주의의 극단이었다. 결국 역대 유례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심판이다.

Q. 공사에서 올해 50년생 이상은 다 내보내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농담으로는 오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하던데...

그야 소문이니까... 5자가 들어가는 사람은 다니기 어렵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그만큼 얼어붙은 현장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희망퇴직은 54년생부터였다. 310명이 희망퇴직을 받아 자회사로 내몰렸는데, 자회사의 여건도 좋지 않아 그만 둔 사람도 굉장히 많았고...

▲ ‘시민고객과 직원이 함께 행복한(?)’ 고객감동데이, 도시철도노조 10대 집행부는 지난 9월 성명서를 통해 전시성 동원행사가 되어버린 고객감동데이 행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Q. 자회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고용은 원래 58세가 정년인데 61세까지 보장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임금은 예를 들어 300만원을 받는 사람이 퇴직한다고 했을 때 정년이 5년 남았다면, 5년 동안 받을 임금의 절반은 희망퇴직금으로 주고 나머지 절반은 자회사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갔더니 취업규칙도 엉망이고, 내몰린 대부분이 1,2,3급들인데, 현장 경험도 없고 하니까 시설물 관리, 정문에서 차량 출입 통제, 오수처리 이런 일을 시켰다. 이러다보니 그만 둔 사람이 많다.

다시 말해 아웃소싱 되었던 부분의 일부를 자회사로 돌린 것이다. 2012년에 공익이 없어지는데, 공익이 했던 일을 빼앗아 하는 셈이다. 정년이 보장된 회사에서 사람을 밀어내려고 하다 보니 그런 방식의 유인책을 썼던 것이다.

 

Q. 개인적으로 아는 후배가 서비스 지원단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기준이 무엇이었나?

희망퇴직을 안 하면 서비스 지원단에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다. 서비스 지원단으로 가는 사람들은 보통 3부류다. ①고 연령 ②징계가 있거나(주로 단체행동에 따른 혹은 노조활동 관련) 병가가 있거나 심지어 산재로 병가가 있는 사람 ③근무평정이 안 좋은 사람. 아직도 서비스지원단은 유지되고 있다. 서비스지원단의 업무는 주로 잡상인 단속, 부정승차 단속, 공사 홍보물 부착 등이다.


Q. 그동안 짓눌려 왔었기에 조합원들이 이번 집행부에 기대하는 바가 클 것 같다.

사실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라는 것보다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정서가 우선이고 또 지배적이다.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가동하면서 사람만 떨어뜨린 게 아니라 고유의 업무도 넘겨버렸다. 너무 압박이 심하다 보니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하는 심정이 지배적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서가 곧바로 투쟁력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단 조합원의 신뢰를 회복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구조조정 문제에 대해서 원칙을 갖고 투쟁을 통해 만들어갈 것이다.


Q. 제3노총이니, 전국지하철연맹이니 언론에서 한참 떠들었다. 지하철연맹 건설논의는 이제 거의 물건너 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서울메트로노조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지 않았나. 당시 상임의장이었던 하원준 前 도시철도노조위원장이 참패를 했으니까, 지방도 주춤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다. 서울메트로노조의 정연수 위원장과는 기본적으로 조직에 대한 상이 다르다. 산별과는 별도로 우리는 서울메트로노조와 도시철도노조간의 조직통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통합하면 조합원 수가 1만 6천 명 정도 될 것이다.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서울시 투자기관인 지하철, 도철의 노조가 통합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으리라 판단한다. 서로 발목 잡는 경쟁관계도 지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Q. 조직통합이 조합원 내부 정서상 가능한지?

이 부분이 철도와는 조금 다른 점인데, 전국의 지하철사업장은 동질감이 매우 크다. 기본적으로 임금체계와 노동조건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 시스템을 토대로 얼마나 아웃소싱 되었느냐의 차이다. 때문에 조직을 통합하는 문제는 내부 정서적으로도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서울도시철도노조 주요연혁

-94. 10. 17 초대위원장 정충권. 노동조합 설립신고

-96. 2. 5 도시철도연맹 발족

-97. 10. 15 4대(직선) 총선거 초대위원장 하원준

-02. 12. 15 연장운행 관련 노사합의서 체결

-03. 6. 4 상급단체 변경(한국노총→민주노총)

-04. 7. 21~24 주5일제 쟁취를 위한 지축기지 총파업

-07. 8. 10 9대 총선거 하원준 위원장 당선

-09. 8. 25 10대 집행부 출범 위원장 허 인

 

[참고자료 #1]

서울도시철도 서비스지원단 개괄


<출처 : 「궤도사업장 구조조정사례집2」, 철도노조>

 

2008년 4월 서울도시철도공사 음성직 사장은 승무분야는 3급 이상으로 54년생 이상인자, 타 분야는 직급에 관계없이 무조건 54년생 이상인자 등 총 840명(정원의 13%)을 각각 ‘창의업무지원센터’와 ‘서비스 지원단’으로 발령했다.

사무직으로 구성된 서비스지원단 308명은 잡상인 등 지하철 내 무질서 행위를 단속하고 역무지원 및 공익근무요원 운영 업무를 맡았다.

기술직이 배치된 창의업무지원센터 직원 532명은 스크린도어, 승강기 등 역사 편의시설 종합 유지관리와 역사 리모델링, 신규사업 개발 등을 맡았다. 공사측은 “두 부서에는 경력이 풍부한 55세 이상 직원 210명과 신입 직원들이 섞여 배치됐다"며 "조직 개편을 통해 확보된 인력을 시민 서비스 강화와 신기술 개발에 이용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3개월 간 퇴출의 위협에 시달리며 하는 일도 별로 없이 출퇴근만 반복하던 이들은 다시 현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직책은 주어지지 않았다. 관리 또는 지원분야에 있었던 직원들도 모두 직책 없이 평직원 신분으로 근무했다. 몇 개월 뒤인 2008년 말 공사는 느닷없이 이들에게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 희망퇴직을 하면 ‘자회사에 배치해 월급 80% 보장’과 ‘정년 3년 연장을 해 주겠다’고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또다시 서비스지원단에 배치하든가 직무재교육을 통해서 점수가 낮은 경우 모조리 강제 퇴직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300여명이 견디다 못해 희망퇴직을 하고 자회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지를 관리하는 경비용역, 중정비, 유실물관리, 기술관련 자회사들의 월급과 근로조건은 공사에서 선전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상당수가 다니던 자회사를 그만두었다.

2009년 2차로 60여명의 직원을 서비스지원단에 발령했다. 발령기준은 자회사로 가지 않은 직원, 근태에 문제가 있는 직원, 민주노조 활동한 직원 등이었다. 이들이 하는 업무는 잡상인단속, 질서유지 등이다. 이들은 공사의 은근한 퇴출압박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희망퇴직을 하고 자회사로 갔던 동료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직무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오히려 공사의 부당한 인사발령에 대해 법적인 소송을 제기하는 등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참고자료 #2]

서울메트로의 서비스지원단의 실체


<출처 : 프레시안>

 

모멸감 줘 퇴출 수순

서울메트로가 2008년 5월 대(對)시민 서비스질 향상을 위해 무능력자와 업무부적격자를 대상으로 재교육을 실시하겠다며 신설한 서비스 지원단, 여기에 발령을 받았던 314명은 지난 4개월 동안 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던 것일까? 그 답은 ‘아무 교육도 이뤄지지 않았다’였다.

서비스 지원단에 발령을 받은 사람들은 교육은 커녕 오히려 열악한 근무환경과 형식적인 업무로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의 선진화니 서비스 질 향상이니 하는 구호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이들에게 모멸감을 주어 제 발로 걸어 나가게 하는 등 퇴출을 위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한 달 동안 일 없이 출퇴근만 했다

서비스지원단이 신설될 때 서울지하철노조는 이것이 지난해 오세훈 시장이 내놓은 현장시정지원단이라는 이름의 공무원 퇴출제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발령지 근무자들은 ‘한 달 동안 어떠한 업무수행도 없이 한 사무실에 모여서 출퇴근을 반복하기만한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말이 시설물 점검과 차량 점검이지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돌아다니며 역사 안에 파손된 파일 등과 같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시설에 대한 체크를 하는 일이었다’며 ‘차량점검의 경우 차량을 돌며 파손된 손잡이를 체크하는 등 정말 왜 이런 일을 지시할까 싶은 형식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수년 간 수행했던 일, 직무능력, 기술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업무배치에 모욕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또 서비스지원단에 발령받은 50, 51년생 장기근속자의 경우 사측은 ‘사회적응 재활프로그램에 따라 발령을 냈다’는 사유를 들었으나 실제 업무는 그런 사유와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십 명을 비좁은 사무실에…모멸감 느꼈다

또 이들이 배치된 사무실은 단 한 곳도 사무집기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탈의실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 수십 명이 함께 근무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발령자는 임금이 하락한 점도 밝혀졌다. 승무원은 기본급 비율보다 수당이 월등히 높은 편인데 서비스지원단에는 수당이 거의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일부는 서비스지원단 발령 전 기본급의 50%를 받기도 했다. 퇴직을 앞둔 이들의 경우는 퇴직금이 500만 원에서 1000만 원 정도 줄어드는 불이익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서비스지원단에 간 사람은 도덕적, 업무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가족관계와 사회생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발령 기준도 모호해

서비스 지원단 신설 초기부터 지적된 발령 기준의 모호성도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314명의 대상자 중 186명이 퇴직예정자이고 나머지는 업무부적격자, 근무지 이탈 등의 사유이다.

다산인권센터의 김산 활동가는 ‘서울지하철공사가 인사이동의 근거로 제시한 근무평가서의 기준은 사람마다 달랐다’며 ‘근무평가연도도 1년에서 5년까지 차이를 보이고 고과점수나 병가 사용에서도 일관된 기준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일부에 대해서는 아예 발령사유를 명시하지 않고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발령 사유에 관한 자료를 보여달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아 ‘발령의 명확한 기준이 뭐냐’는 질타를 받았다. 결국 ‘사업장별 배당 인원을 채우기 위한 무리한 할당량 채우기가 아니었냐’는 지적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문제는 2008년의 서비스지원단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서울메트로는 올 연말까지 현재 1만 284명의 정원 중 404명을 줄일 예정이고 2010년까지는 단계적으로 2088명을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도 매년 이 같은 모멸감을 겪어야하는 이들이 전체 서울메트로 직원의 20%나 되는 것이다.

서울시의 현장시정지원단과 서울지하철공사의 서비스 지원단, 앞으로 또 어디서 이 같은 허울뿐인 퇴출제가 생겨날지 공기업 노동자들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현장의 증언(서울지하철 이영표 씨)

인터뷰에 앞서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이영표씨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서 그간의 힘든 싸움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직사수 투쟁과정을 열띠게 말하던 그는, 서비스지원단에 발령된 후 동료들이 겪은 사연을 말하는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Q. 어떤 사람들이 서비스단으로 갔나? “주로 50, 51년생 분들이 많았다. 우리 기술지부 1명은 전대 위원장 경력, 나머지 넷은 몇 년 전 주의 기록 1회 때문이었다. 입사 2년차 신참이 ‘소속장 말 안 들었다’고 갔다. 휴직, 심지어 군 휴직 중인데 배치된 사람도 있었다. 승무지부는 안전 문제로 감기만 걸려도 병가를 쓰게 하는데, 그걸 갖고 보냈더라. 그런데 그런 사람이 다 간 것도 아니다. 원칙이 없다. 얼마 전 서비스단에 갔다 나와서 투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사위를 열었는데 한 명은 ‘건방지게 따졌다’고 해고하고, 나머지에게는 ‘소속은 서비스단인데 정직 3개월 처분 후 복직시켜주겠다’고 했다. 정직은 엄청난 징계다. 월급도 없고 기록이 남아 나중에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Q. 서비스단은 어떻게 운영되었나? “완전 수용소 분위기였다. 사무실도 없어서 빈 창고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문서 수발, 노인들이 하는 질서유지 일, 아니면 무작정 현장에 내보냈다. 매일 행동보고서를 제출시켜 점수를 매겼다. 나이든 분들은 더럽다고 상당수 퇴직하기도 했다. 사실 알아서 나가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Q.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제일 힘든 건 가족들의 시선이었다. 사측은 언론에다 ‘불량자’들을 발령냈다고 기자회견을 하고, 통지서를 집에까지 보냈다.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했겠나. 누구는 이혼하게 생겼고, 누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생겼단다. 나도 아내와 정말 많이 싸웠다. 내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어버이날에 편지를 주더라. ‘아빠, 더럽고 치사해도 거기 들어가서 근무해.’ 평생 일한 사람들을 그렇게 파렴치범으로 몰다니…. 모두 정말 엉엉 울었다. 한 분은 빈 담뱃갑을 산처럼 쌓아놓고는 ‘하루 한 갑이 두 갑 됐다. 이 담배값이라도 받아야 덜 억울하겠다’더라. 또, 암 투병 중이던 한 분이 최근에 돌아가셨다. 서비스단의 영향이 분명 있다고 본다.”


Q. 거부투쟁은 어떻게 진행했는가?
“다른 동지들이 ‘조직개편 때문에 분소가 없어져서 지킬 자리 자체가 없다. 같이 농성하자’고 해서 3개월 간 선전전과 농성투쟁을 해왔다. 차량지부의 한 분은 올해 정년인데도 ‘직장이 이 꼴이 났는데 후배들 앞에서 나 몰라라 할 수 없다’고 함께 싸웠다. 일과 중에 선전전을 하고, 밤에는 집에까지 자전거 타고 가면서 운동을 대신한다. 처음엔 밥도 못 먹었지만, 농성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동지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흐트러지지 못하겠더라.”


Q. 복귀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사측이 복귀조치만 해놓고는 직책을 안 줬다. 야간수당이나 시간외 수당을 못 받아 1년 평균 500만 원, 교대자는 1천만 원 정도 금전적 손해를 보고 있다.”


Q. 서비스단 신설 후 현장이 어떻게 달라졌나?
“올해 안에 2, 3차를 발령할 예정이라고 이미 회사 공문에 다 나와 있다. 현장에는 ‘다음은 바로 나 아닐까’ 하는 불안이 극심하고, 찍힐까봐 부당한 명령이라도 거부 못한다. 사장이 현장감시단을 더 늘리고 ‘주의, 경고 이상부터 징계를 내려라’고 했다. 현장 꼴이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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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식 | 조합원




  성님! 안녕하시지라.
  성님이야, 불쑥 나타나 요로게 말을 붙인께 요놈이 언놈이다냐 헐것이요. 당연하지라. 성님이야 어찌 나를 기억허기야 허것소. 십년도 훨씬 전에 가리봉 언저리서 동네 글쟁이들과 섞여 막걸리 두어 번 마시며 대면한 것이 다인디. 그라도 나는 그때의 성님 모습이 지금도 훤허요. 황소마냥 순한 눈매로 진짜 소 마냥 끄덕끄덕 턱없는 주절거림까지 잘도 들어주던 모습…… 그렁께 오늘도 그냥 내말만 헐라요.
  엊그제 하루파업을 허고 과천으로 데모하러 갔는디 말이요. 가서 가만히 허는 말들을 들어본께. 참 거시기 헌 것이 철도, 발전, 가스는 물론이고 병원, 연금, 연구소들까지 줴다 국민한테 봉사하는 게 업인 노동자들이 모였는디, 나라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말들이 다 똑같습디다.
이문도 못 남기는 것들이, 임금은 많이 받음서 놀고 먹는 놈들 천지에 트집잡기나 하는 노조를 갖고 있응께 나라에서 가만둬선 안 되것다. 노조 뭉게고, 임금 깍고, 노동자 줄이고……
  공공기업을 이문 남기는 기업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아마도 나라밖에 놈들이 손뼉침서 더 좋아 헐 것인디.

  데모 끄트머리에 도시철도노조 거시기가 나와서 잊을 수 없는 당부를 한마디하고 갑디다.

  “느그들~ 지금이라도 잘해. 우덜 짝 나지 말고.”

  예전의 성님 시 한수가 딱 작금의 철도쟁이들과 한가지같그만이라.



지금 우리나라 산에는


벌채 허가가 났다
기계톱 소리가 산천을 짓밟으며
맨 처음 건강한 소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바람 앞에 마른 함성으로 맞서던
참나무들이 뒤이어 쓰러졌다
푸르고 무성하던 꿈들을 가슴 속에 숨기고
회색빛으로 시치미를 떼던 오리나무들도
밑둥이 잘렸다
단풍나무, 삼나무, 박달나무, 때죽나무, 쥐밤나무……
첨부터 산에 자리잡고
산의 주인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나무들이
우리나라 산에서 밀려났다

산에는
이제 까시쟁이뿐이다
개호랭이, 쌀가지, 오소리……
이빨 사나운 짐승들이나 키우는
아카시아나무, 명감나무, 청마람넝쿨……
이빨 사나운 까시쟁이들

산마다 천편일률의 바람소리
바람소리에 맞추어
망나니의 춤사위로 열광하는
까시쟁이들.

                  -「우리들의 사랑가」창작과비평사, 1991년

김해화

  1957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남.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시여, 무기여」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인부수첩』(실천문학사),    『우리들의 사랑가』(창작과 비평사), 『누워서 부르는 사랑 노래』(실천문학사)를 펴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일과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1981년부터 지금까지 공사장 철근공으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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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수 | 조합원




 
  지난 호에 풍운아 미켈란젤로 카르바조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많이 유쾌해했었다. 동네 술집에서 멱살잡이하며 싸워서 파출소에 끌려가는 등 카르바조의 여러 가지 재미난 일화를 다 소개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어쨌든 카르바조는 「토마스의 불신」이라는 그림에서 부활한 예수의 옆구리 창 상처에 불쑥 손가락을 넣음으로서 당시대에 ‘퍽큐’를 날렸다(77호 기사참조).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불경하다고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 어느 시대나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카르바조는 유쾌한 사건 메이커였다.

  이번 연재의 주제는 지난번과는 정 반대로 슬픔이다.
  지금 대한민국 곳곳에는 슬픔이 넘쳐흐르고 있다. 극소수사람들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대다수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눈물을 곱씹어야 하는 시대다. 그것도 아주 깊게.
  철도 현장도 예사가 아니다. 곳곳에서 철도노동자들의 노동이 경시되고 노동자의 권리가 내팽개쳐지고 있다. 몇몇 수치목록을 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측은해지기까지 한다.
  철도가 갖는 사회경제적 가치는 도외시한 채 숫자놀음으로 점령군처럼 윽박지르는 상황이 위아래를 막론하고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소위 철도의 높은 사람들은 철도의 두 갈래 길이 얼마나 깊은 슬픔 속에서 만들어져 왔고 유지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침목 하나하나에 선로 마디마디에 일제에 의해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베여 있고, 해방 후에는 우리 철도노동자들의 묵묵한 희생과 노력 위에 오늘도 열차는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고나 있을까?


시엔의 슬픔

  슬픔의 대표적 그림은 고흐의 「슬픔」이란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슬픔」은 고흐의 동거녀 시엔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시엔은 잘 알려져 있듯이 몸을 파는 여자였다. 앞에서 시엔을 고흐의 여인이나 연인으로 쓰지 않고, 일부러 동거녀란 말을 썼는데 이유는 동거녀가 가지고 있는 우리시대 낮은 지위 말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버림받은 여자, 그 누구도 차가운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여자인 시엔을 고흐가 감싸 안았다. 역사상 이렇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여자를 감싸 안은 사람은 예수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쩌면 고흐는 이미 예수처럼 평범한 인간들을 초월한 진실한 사랑을 추구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잠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구절을 보자.
 
  “글쎄, 예절과 교양을 숭배하는 너희 신사들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 어떤 쪽이 더 교양 있고, 더 자상하고, 더 남자다운 자세냐?
  지난겨울, 임신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헤메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하루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주어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는 병색이 짙어 보여서 눈길이 갔다......「고흐의 편지」中”


  병색이 완연한 굶주림에 지친 임산부인 시엔의 눈에 이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 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녀가 알몸으로 무릎을 세운 채 앉아 팔을 모아 고개를 파묻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고흐는 「슬픔」이라 했다. 채색되지 않은 검은 목탄으로만 그려진 「슬픔」에 서경식씨는 보편적인 힘이, 예술의 힘이 있다고 말한다.



  “제가 알고 있는 한국 여성 중에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왔습니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에 민중항쟁이 일어나, 미군과 반공경찰, 군대가 섬 주민을 3만~8만 명 정도 학살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겨우 10년 전부터 이야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학살을 소설로 쓴 제주도 출신 소설가 현기영은 제주도에 대해 ‘암울한 남쪽 바다에 떠있는 고절한 섬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가난과 학살의 기억으로 덧칠된 섬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곳의 기억을 지우려고 발버둥쳤다’고 말했습니다. 제주도의 한촌에 살던 소녀 시절, 외출공포증이었던 A의 방에는 발가벗은 채로 주저앉아 있는 여성을 그린 고흐의 그림 복제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이미지가 일순간에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유럽에서 유학하던 막내 숙모가 사다준 기념품이었다고 합니다. 학살의 기억을 가진 암울한 남해의 섬, 사춘기 소녀가 방에 틀어박혀 있고, 그녀의 방에는 막내 숙모가 사다준 고흐의 「슬픔」이 걸려있다.... 이 그림에는 그만큼의 보편적인 힘이 있습니다. 예술의 힘입니다.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절망의 끝에 떨어진 사람들의 공통된 언어인 줄도 모르겠다.
 

비밀엽서

  다음 그림은 주간지 한겨레21 비밀엽서 프로젝트에 응모된 것 중에 발견한 「슬픔」과 비슷한 그림이다.
  비밀엽서 프로젝트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면의 상처들에 대해 털어놓음으로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서기 조합원들도 참여할 수 있다. 한겨레21에 비밀사연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독자들이 보낸 엽서 중 한 장이 매주 게재된다.
  젊은 여자가 알몸으로 웅크린 채 앉아있다. 고흐의 「슬픔」을 뒷면에서 약간 각도를 틀어 보는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20대의 첫걸음을 막 내디딘 시간. 희망의 미래를 꿈꾸어야 할 때 상처받은 마음은 깊은 고통 속에 매몰되어있다. 성추행을 당했고 부모들에게 버림받았고 대학도 떨어졌다. 계속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 자포자기의 극단에서 희망이 없다. 고흐의 여인 시엔처럼 알몸으로 희망 없는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비밀엽서의 주인공이 얼마나 큰 좌절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인지 느낄 수 있다.



  다음 그림은 모사 작품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선배화가들의 그림을 베껴 그렸다. 바둑을 배우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고수들의 대국을 복기하는 것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고수들의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화풍과 기법을 연구하고 실력을 쌓는 것이다.
  고흐도 동생 테오가 보내준 수많은 밀레의 그림을 모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유명한 작품 중 일부는 밀레의 작품을 그린 것이 많다. 밀레의 여러 작품들이 고흐의 손을 거쳐 어떻게 변화했는지 연재 속에 알아 볼 기회도 가져볼 참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파리의 르브루 박물관에는 당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려는 화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르노아루, 마네와 같은 시기 활동했던 베르트 모리조 같은 여류화가도 르브르를 자주 찾았던 사실이 그녀의 딸인 마네(유명화가 에두아루드 마네의 조카)의 일기에 잘 묘사되어있다.
  최근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겸재 정선 서거 250주년 특별전이 열려 관람을 했는데 한가한 평일 오전 겸재의 수묵화 앞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인 듯한 남녀가 각각 다른 그림 앞에서 스케치북에 열심히 붓을 놀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래 작품은 「서울기관차 노보 75호』 뒤표지에 실렸던 그림이다.




철도노동자의  슬픔

  서기지부 교선부장 김선욱군의 모사 작품인데 위에서 소개한 고흐의 「슬픔」을 그린 것이다. 본인 생각에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지 지부사무실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놓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 바탕화면 앞에 앉아 있다가 희선양으로부터 야동 보는 것 아니냐는 핀잔을 얻어먹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이 무시된 6월 근무표」란 표제 아래 울고 있는 시엔의 모습이 철도노동자의 모습이다.
  세상이 뒷걸음치니 염치도 없어졌다. 슬금슬금 우리들의 복지가 무너졌다. 출퇴근을 하기위해 새로 산 교통카드를 지하철 단말기에 댈 때마다 우리 사장님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연전에 일본의 철도시스템을 보러갔을 때 JR현장의 노동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입사해서 수습 끝나고 정식직원 되었을 때 직원용 무임승차권 받을 때가 제일 뿌듯했다고. 국적을 떠나서 철도에서 일하는 사람 맘은 다 똑같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작지만 업무용 승차증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가졌던 자부심은 지금 허공으로 사라졌다. 직원들의 소박한 자긍심조차 지켜 줄 능력이 안 되는 걸까?
 
  공사에서 내놓은 단체협상안은 노골적으로 철도노동자들을 조롱하고 있다. 노조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악의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정부가 공무원노조에 가하는 어이없는 대응과 강경일변도의 한나라당의 노동정책도 노동에 대한 경시와 노동자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강하게 묻어난다.
  바람이 오기 전에 숲이 먼저 눕는다고 세태가 이렇다 보니 중간관리자들마저 자기세상 열린 듯 노동자들을 우습게보고 무시하고 있다. 곳곳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벌거벗겨진 채 얼굴을 묻고 깊은 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저들의 핏대 세운 목에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가 송곳이 되어 철도노동자들의 가슴마다 후려 파고 있다.

  몇 년 만에 단풍마저 붉디붉게 물들어 처연한 이 가을에.
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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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단 한 번... 하늘은 한없이 푸르르고 산은 붉게 물들어 갈 때 자라섬은 재즈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신경섭 | 조합원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자라섬에서 국제적인 규모의 재즈 페스티벌이 개최된 지도 벌써 올해로 6년째입니다.
  6년 전, 재즈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큰 규모의 재즈페스티벌을 개최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발상의 무리였으며,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을까하는 근심을 낳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결과는 기대를 크게 웃도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솔직히 대한민국에 재즈 팬이 이렇게나 많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재즈를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상 이런 페스티벌을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재즈 팬들이 자라섬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이제는 세계의 어는 재즈페스티벌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말 그대로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또 하나의 큰 뮤직페스티벌이 있다는건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항상 한여름 장마철 전후로 개최가 되어 비옷과 장화는 필수 준비물인 페스티벌 이지요^^
  처음 편집장이 제안을 하셨던 건 펜타포트였으나, 본인이 록음악을 끊은 지도 좀 되었고...올해는 펜타포트에 다녀오지 않아서 자라섬을 쓰겠다고 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펜타포트와 자라섬은 음악의 성격만큼이나 페스티벌의 분위기도 매우 다릅니다.
  펜타포트는 역시나 록음악이라 연령대도 비교적 젊고 활동적인 분위기입니다. 비가오든 말든 음악에 맞춰 신나게 뛰어 놀다가 해떨어지고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 즈음이면 공교롭게도 낮부터 마신 맥주의 취기 또한 극에 달하여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자라섬은 상당히 차분하고 가을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그런 페스티벌입니다. 일단 모든 관객들이 준비해온 돗자리를 잔디밭에 깔고 앉거나 혹은 누워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음악 감상을 시작합니다. 물론 신나는 연주가 나오면 일어서서 춤도 추고 하지만 펜타포트에 비하면 상당히 차분한 분위기이지요.

 
서문이 좀 길었는데 각설하고 본격적인 참관기 들어가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자라섬에 가기 위해 예년에 비해 많은 준비와 시간을 들였습니다. 티켓은 이미 두 달 전에 3일권을 할인가로 예매해 두었고 숙소를 준비해야 하는데... 작년에 자라섬에 오토캠핑장이 오픈하는 것을 보고 내년엔 여기서 캠핑을 하자라고 굳게 다짐 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계획은 청량리 기관차의 비담이라 불리운다고 본인의 입으로 얘기하고 다니는 춘옥이형과 함께 자라섬 오토캠핑장에서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2박 3일간 노숙을 할 계획 이였습니다. 허나 캠핑장 예약사이트는 오픈과 동시에 폭주를 하였다고 하고 역시나 게으른 본인은 한참 후에야 이미 예약이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차선책을 아주 약간 궁리한 끝에 그냥 될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보통 재즈 페스티벌은 9월 말경에서 10월초 사이에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간 진행이 되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좀 늦은 10월 중순경에(10.16~18) 개최가 되었습니다. 작년에 금요일 오전에 느지막이 출발하였다가 경춘 국도 위에서 차량지옥을 경험했던 터라 올해는 목요일 밤에 여유 있게 출발하기로 계획하고 10월 교번이 나옴과 동시에 재즈페스티벌을 위해 교번을 맞추어 놓았습니다.

10월 15일 오후  페스티벌 전야

  근무가 끝나자마자 남양주에 위치한 춘옥이형 집으로 바로 달려가 간단히 장을 보고 들뜬 마음으로 가평을 향해 달렸습니다. 가는 길에 숙소에 대해 상의 한 결과 작년에 묵었던 사람 좋은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일단 이틀을 묵기로 하고 마지막 하루는 얼마 전 홍천으로 이사한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습니다.
  약간의 헤맴 끝에 저녁 늦게 펜션에 도착, 느닷없이 방문한 우리를 알아보고 반기는 사장님과 늦은 저녁 식사 겸 삼겹살에 한잔 걸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덧 날씨가 제법 쌀쌀해 져서 가벼운 옷차림으로는 새벽까지 있을 수가 없는 날씨였습니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들어와 춘옥이형이 준비한 노트북과 프로젝터로 영화한편을 감상했습니다.
  작년엔 팔노치 멤버들도 함께 자라섬에 왔었는데 그때는 이 프로젝터로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클립을 보며 정말 분위기 있는 술자리를 만들었었습니다.
  아무튼 이날 감상한 영화는 라빠르망. 조금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춘옥이형이 적극 추천을 해 주어서 같이 보았는데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엄청나게 밀려오는 꿀꿀함이란... 아무튼 참 잘 만든 영화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이렇게 첫날을 마무리 하고 내일부터는 드디어 일 년이나 기다려온 페스티벌입니다!!

10월 15일 오후  아름다운 째즈의 선율을 찾아

  오전 늦게 일어나 간단하게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짐을 꾸려 자라섬으로 출발했습니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비옷과 우산을 준비하긴 했으니 아직까진 날씨가 맑습니다.
  돗자리와 캠핑용 의자, 먹고 마실 거리 두꺼운 옷가지 등등 편안하게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한 준비물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자라섬에 도착 아직 첫날이라 그런지 차량도 적고 주차장에 자리도 많이 있습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짐을 들고 가려니 한 짐입니다. 매표소에서 예매한 티켓팔지를 수령하고 메인 스테이지까지 한참을 걸어가려니 한숨부터 나옵니다. 춘옥이형은 자전거를 가져와야겠다며 다시 차로 돌아갔습니다.
  조금 가다보니 코끼리열차라는 줄줄이 버스가 있더군요. 잘됐다 싶어 승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달랑 한 대로 운영을 하는지라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도 한 짐 들고 걷는 것 보단 낫겠다 싶어 조금 기다려 짐과 함께 몸을 실었습니다.
  얼마나 갔을까요. 입구에서부터 메인 스테이지까지 운행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중간에서 다 왔다고 내리랍니다. 일단 내리고 나서 보니 작년에 비해 크게 바뀐 것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우선 올해는 롯데라는 대기업이 스폰을 해주는 건지 사방에 롯데 멤버스로고입니다. 작년에 메인스테이지가 있던 넓은 잔디밭엔 각종 행사천막과 엄청난 규모의 이동식 롯데마트가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페스티벌의 규모가 커지니까 대기업에서 역시 돈 냄새를 맡았나 봅니다. 그렇다면 메인스테이지는?
  구석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또 하나의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이 메인스테이지랍니다. 메인스테이지 입구에 도착하니 이곳을 출구라고 반대편으로 가랍니다. 또 다시 짐을 들고 이동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는데 네 시부터 입장 가능하다고 기다리랍니다.
  입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네 시까지 기다려 드디어 입장. 자리를 옮긴 메인스테이지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좋은 잔디밭은 대기업에 내어주고 모래 섞인 잡초밭에 멍석 깔고 메인스테이지랍니다. 입구 옆으로는 이동식 편의점과 각종 먹을거리를 파는 천막들이 죽 늘어서 있고 저 끝에 무대가 보입니다. 짐보따리 잔뜩 들고 또다시 걸어 드디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직 페스티벌이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불평거리가 여러 개 보입니다. 암튼 즐기러 왔으니 불평거린 접어두고 맥주 한캔을 손에 들고 즐길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시작된 페스티벌의 첫무대는 국산 재즈밴드인 이상민밴드.  드러머인 이상민씨는 여러 세션활동으로 쌓아올린 실력으로 드러머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 활동을 합니다. 전자악기편성의 강렬한 퓨전재즈음악을 들려줍니다. 라이브 공연에 목말라 있던 터라 절로 몸이 들썩입니다.
  두 번째 밴드가 올라올 즈음엔 날씨가 꾀나 쌀쌀해져 뜨거운 커피한잔이 생각납니다. 춘옥이형이 준비해온 코펠에 버너로 물을 끓이려는데 행사진행요원이 다가와 화재의 위험 때문에 버너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제제를 가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별 통제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올해는 진행요원들의 수가 작년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들의 주 임무는 ‘뭐뭐하면 안 돼요’라며 통제하는 것이라고 교육 받았을 테니 알았다며 대충 돌려보낸 뒤 버너를 숨겨 다시 물을 끓입니다.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준비해간 침낭을 꺼내 덮고 누웠습니다. 눈앞으로는 해질녘의 파란 하늘에 모양 갖춘 예쁜 구름들이 보이고 두 귀로는 아름다운 재즈선율이 흘러 들어오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습니다. 순식간에 두 번째 밴드의 공연까지 끝나고 이미 어두운 시간 개막식이 시작됩니다. 주최자와 가평군수의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기대했던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허나 이 역시 실망입니다. 작년 개막식 때는 바로 머리위에서 터지던 불꽃들이 올해는 저 멀리서 터집니다. 메인스테이지가 이동함에 따라 불꽃을 설치할 장소가 마땅치 많아 저 멀리 강 건너편에 설치한 듯싶습니다.



  개막식 후 세 번째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많이 쌀쌀해져 침낭까지 덮고 있었는데 빗방울이 덜어지기 시작합니다. 서둘러 침낭을 정리하고 비옷을 꺼내 입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내렸지만 이정도 쯤이야 재즈의 뜨거운 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양말까지 벗어 던지고 음악에 몸을 맞기다 보니 벌써 마지막 공연까지 끝이 났습니다.
  비록 올해는 시작부터 불만거리가 많이 보였지만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재즈 거장들의 연주를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즈페스티벌의 가치는 일 년을 손꼽아 기다릴만합니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자정이 넘었지만 하루종일 밥다운 밥도 먹지 못해 문 열린 식당을 찾다 가평 역 앞의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전의 식당치고는 은근히 맛집입니다.
  숙소로 돌아와 비와 진흙에 젖은 돗자리와 비옷을 대충 정리하고 있는데 펜션 사장님이 소주를 들고 찾아오십니다. 자기 전에 소주한잔과 이야기꽃을 한 번 더 피우고 늦게 잠을 청합니다.

10월 17일 (토)  재즈 페스티벌의 절정

  오늘도 오전 늦게 일어나 어제 정리해놓은 돗자리들을 다시 한 번 씻어내 말립니다. 펜션 사장님이 해물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합니다. 대충 씻고 짐을 챙겨 길을 나섭니다. 국물이 시원한 것이 정말 맛납니다. 밥까지 비벼먹고 사장님과는 작별을 한 뒤 자라섬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습니다. 자라섬에 들어서려는데 차량들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가까운 주차장은 꽉차버리고 저 멀리 주차장으로 유도합니다. 짐 들고 어제보다 훨씬 많이 걸어갈 생각하니 암담합니다. 암튼 힘겹게 메인스테이지까지 걸어왔는데 오늘은  네 시 반부터 입장이랍니다. 오늘도 입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집니다. 하늘은 맑은데 지나가는 비려니 했는데 제법 떨어집니다.

  돗자리 하나를 뒤집어 쓰고 맥주한잔 마시다 보니 비가 그칩니다. ‘누군가 무지개다!!’외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산위로 무지개가 걸쳐있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크고 선명한 무지개는 처음 봤습니다.

 
  어느새 뒤로 줄서있는 사람들의 끝이 안보입니다. 이미 첫날에 비하면 엄청난 인원수입니다. 입장이 시작되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좋은 자리를 잡기위해 춘옥이형이 자전거로 달려 나가려 했는데 출발과 동시에 체인이 걸려버립니다. 결국 제가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망나니마냥 뛰어 갔습니다. 개고생 끝에 잡은 자리는 정말최고의 명당 이였습니다. 무대 바로 앞에 연주자들의 콧구멍까지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드디어 오늘 공연 중 가장 기대가 컸던 세 번째 밴드가 올라옵니다. 베이시스트 아비샤이 코헨이 이끄는 오로라라는 밴드인데 이 아비샤이 코헨이라는 뮤지션이 정말 물건입니다. 무명시절 칙 코리아라는 거장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여러 장의 앨범을 발매하고 지금 독립해 자신의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베이스와 하나가 되어 교감을 주고받는 그의 연주는 한마디로 열정적입니다. 빼어난 실력에 무대 매너 또한 뛰어나니 그의 공연은 정말 열광의 도가니였습니다. 공연이 절정에 이르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막바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리듬에 몸을 맞기고 있었습니다.
  추운날씨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감탄했는지 아비샤이도 중간에 자신의 카메라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가더군요.

  마지막 팀은 집시킹즈의 창단멤버인 치코가 이끄는 치코 & 더 집시즈의 무대였습니다. 7명의 기타리스트가 일렬로 서서 서로 노래를 부르며 정열적으로 플라맹고를 연주하는 모습은 이미 아비샤이의 무대로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을 초반부터 춤추게 만들었습니다. 멤버 개개인의 뛰어난 연주 솜씨와 무대매너는 둘째 날 공연을 역시 최고의 공연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느덧 둘째 날의 공연도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곳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누구하나 얘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기 있었던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쓰레기는 출구 쪽에 모아서 쌓아두었는데 올해는 그냥 어지럽힌 채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왠지 좀 씁쓸하더군요.
  원래는 파티스테이지로 이동해 새벽까지 즐길 계획 이였으나 오늘은 홍천 사는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한날이라 너무 늦지 않게 가려고 파티스테이지는 결국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철도에 들어오기 전 춘옥이형과 바이크를 타면서 동호회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친구인데 아직까지도 좋은 인연으로 남아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네요. 홍천에 도착해 친구의 전원주택에서 간단하게 한잔하고 마지막 남은 하루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0월 18일 (일)  페스티벌의 아쉬움을 뒤로

  친구의 집에서 늦게까지 자고 푹 쉬었다 오느라 오늘은 좀 늦게 출발했습니다. 자라섬에 도착하니 벌써 첫 밴드의 무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앞자리는 이미 꽉차있어서 중간정도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전혜림씨의 무대였는데 별로 기대를 하는 무대는 아니었던지라 이것저것 간식
거리를 먹으며 관람했습니다. 전혜림씨의 무대가 끝나고 자리를 좀 더 앞으로 옮기고 나니 슬슬 잠이 몰려옵니다. 지난 며칠 간 피곤이 쌓였나 봅니다.

  드디어 기대하던 스캇 헨더슨, 데니스 챔버스, 제프 베를린, 괴물급 테크니션 으로 구성된 두 번째 밴드가 올라오고 엄청난 연주를 들려주기 시작하는데... 침낭을 덥고 누운지라 살짝 잠이 들어 버립니다. 잠결에 들려오는 엄청난 사운드에 번쩍 눈을 떠보니 이미 마지막곡을 연주하고 있더군요.
 
  암튼 기대하던 공연을 잠으로 날려 버리고 마지막 밴드의 공연입니다. 디디 브릿지워터라는 세계적인 재즈보컬의 무대였는데 이거 완전 실망이었습니다. 디디의 노래와 매너는 완벽했는데, 세션으로 올라온 밴드가 절망적이었습니다.
  서울 재즈빅밴드라는 우리나라 밴드가 연주를 해주었는데 말이 재즈 빅밴드지, 연주는 정말 쪽팔릴 정도로 형편없더군요. 즉흥연주의 경험도 없는, 악보대로만 연주해온 클래식 연주자들을 모아놓고 재즈를 연주하는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장의 지휘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있고 한명씩 돌아가면서 즉흥연주를 시키는데... 차라리 안 시키는 게 좋을 듯 했습니다.
  개념 상실한 단장 앞에서 서로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곡의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 못한 연주는 둘째치고서라도 서로 호흡도 안 맞아 곡의 마무리조차 못하는... 세계적인 뮤지션을 불러놓고 이런 허접한 밴드를 무대에 올리다니... 정말 실망이었습니다. 다행히 디디가 사람이 좋아서 좋은 밴드라고 연신 칭찬을 해대긴 했지만 듣는 제가 다 민망했습니다.

  비록 유종의 미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로서 2박 3일간의 페스티벌은 폐막식을 끝으로 대단원의 문을 닫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마무리할 때 올해의 아쉬웠던 점등을 적으려 했으나 이만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의 아쉬움은 내년엔 개선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가슴 한 편에 묻어두고 부푼 기대감으로 또다시 일 년을 기다리려 합니다. 매년 풍성해지는 라인업과 더욱더 커지는 행사의 규모를 보면 이제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자연과 어우러진 무대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재즈는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어렵고 생소한 음악이긴 하지만 음악엔 어떠한 장벽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냥 마음과 귀를 열고 빠져들기만 하면 되는 음악입니다. 청량한 가을 여러분들도 재즈의 매력에 퐁당 빠져보시길...
  끝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에 함께해 좋은 시간을 보낸 청량리 기관차의 전현옥 기관사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춘옥이형 내년에도 함께 하자구요~


  2009년 8월 31일 폐암으로 타계한 에디 히긴스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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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저자는 이 글을 새벽에 술을 마시다 순간적인 feel로 단박에 갈겨 써내려간 글이라 고백한다. 과연 이 글을 노보에 실어도 되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안타깝게도 실어서는 안 될 확실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읽는 도중 어지러움을 느낄 경우 독서를 중단하길 권한다.



장동수 | 조합원




1.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 열 시. 신촌이란다.

택시를 탔다.

이만 오천 원이란다. 이런 개 같은......

“이 시간에 왜?”

“선배님!”

“응...”

“서른여섯 번 이력서를 넣었어요.”

“그런데?”

“......”

“씨발, 술이나 처먹어. 어쩌라고.”


이 후배 녀석 맘도 알 것 같다.

애인은 모 방송국의 기자로 있는데 녀석은 올해 졸업반이다.

개 같은 군대 다녀오느라고.

뽀대 나는 사회인이 되어 볼까하고 들이대다가 번번이 낙방하고,

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고 나한데 엉겨 붙는다.

한마디로 개 같은 경우지.

애인한데 술 얻어먹지 나한데 왜.



2.

내가 84학번이니까 약 26년 전쯤이다..

촌놈이 서울 와서 빌어먹으려고 누구의 소개로 남의 집에 간 적이 있다.

식탁에 달랑 밥 한 그릇 퍼놓고 주인은 개를 껴안고 난리를 치더군.

대문을 나서면서 배때기를 걷어 차버렸지.

개 같은 욕이 내 뒤통수로 날아오더군.

그 뒤로 난 개고기 안 먹는다.

그래도 난 양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3.

개 하면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가 생각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개 이름이 파트라슈였던가?

화가를 꿈꾸는 네로는 할아버지와 어렵게 사는 아이였지.

파트라슈와 꿈을 키워 가지만 결국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질 못했지.

이런 개 같은........

아로미를 그리며 하얀 눈의 축복을 받으며 파트라슈의 품에서 죽어갔지.


난 지금도 이해 못해.

좋아하는 아로미를 왜 사랑 할 수 없고, 파트라슈는 왜 죽어야 하고

할아버지는 왜 어린 나를 두고 먼저 하얀 눈 나라로 가셨는지.



4.

난 하얀 눈이 펑펑 나리는 산골에서 자랐다.

까만 똥개를 데리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지.

내가 그 똥개 이름을 생각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말길 .

그러나 그 똥개는 아직도 내 맘속에 자리하고 있다.

무슨 개소리냐고?


개보다 못한 나, 아니 우리들, 그리고 당신들!

난 지금 새벽 세시에 이글을 쓴다.

자다가 일어나서

내가 개 같이 보일지 몰라도 분명 개는 아니다.

그러나 개보다 못한 人間일 수는 있다. 분명히.



5.

난 휴일이면 검도장에 간다. 

산 중턱에 오르면 김똘(개이름)이 마실 나왔다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반긴다.

개도 낯짝이 있더군.

개가 이 정도는 돼야지.


여러분들을 위해 犬馬之路가 되겠노라고 외치면 뭘 하냐고.

이 순간 우리는 이미 개가 되어버린걸.




6.

우리가 개를 먹는다고 서양의 유명한 배우가 한국 놈들은 개 같다고 욕을 했다.

거기에 발 맞춰 우리가 왜 이렇게 야만적이냐고 푸념했다며.

닝기리 로또!


걔들은 거위 입에 강제로 좁쌀(무식한 분들의 이해를 위해서, 좁쌀=조)을 부어 넣고 부리를 묶어놓는데, 좁쌀이 거위의 위에서 팅팅 불어 배가 터져 죽는다지.

그게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위의 간이란 음식 만드는 법이란다.

하긴 개를 매달아놓고 쥐어 패서 잡아먹으면, 고기가 야들야들하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지만.


왜 우리는 안 되고

왜 우리는 남의 말에 솔깃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개 같은 경우지.

개보다 못한 인생이 얼마나 많은데

개한데 공들이는 TV프로를 보면 개 짜증나는 건 이해되는지.


물론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아낀다는 건 좋아.

그럼, 소고기도 삼겹살도 먹지 말아야지.

똥도 싸지 말고. 물도 먹지 말아야지.



7.

난 솔직히 요즘 나이 듦을 살짝 느낀다.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개 같이 살아 보자는 거다.

“개 같은 내 인생”이란 영화도 있듯이.


내 친구 중에 소설가(정완식)가 있다.

그 친구가 항상 나에게 말하길,

“술은 개가 되려고 마시는 거야. 술 마시면서 톨스토이를 논하지 마라. 단지 개가 되자“


이 時代 우리는 개가 되어야 한다.



8.

老子는 그랬다.

아주 오래전 사람이지만, 딱 맞는 말만 한 어른이다


“道를 道라 하면, 이미 道가 아니다.”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한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故幾於道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居善地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心善淵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與善仁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言善信 말 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正善治 다스릴 때는 질서 있게 하기를 잘하고

事善能 일 할 때는 능력 있기를 잘하고

動善時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 한다

夫唯不爭,故無尤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비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든 종교의 眞理일지도 모른다.

가을바람같이 소리 없이 가는 生일지라도

한 번쯤은 개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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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균 | 서기지부 조사차장



Prolog

마징가 제트와 그레이트 마징가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초등학교 1학년 때 언쟁이 붙었다. 당시 최고의 싸움 잘하는 로봇은 누구인지 100만원 내기를 했다. 어떤 놈은 아톰이 최고라고 했다가 무시당했다. 비너스의 가슴공격이 강력해서 아무도 못 이길 거라는 놈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내기를 판정해 줄 심판이 없다. 로봇대백과라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자를 구입했다. 거금 천원이었다. 그 책에 보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키가 몇 미터인지 힘은 몇 마력인지 중량은 몇 톤인지 이런 로봇의 프로필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는 것이다. 수많은 만화영화 속 로봇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건담의 유닛들과 주인공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힘센 로봇을 찾지는 못했다. 너무 많아서 찾다가 지쳤기 때문이다. 매번 그랬다.

  어린 시절,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다. 학교 앞 가게에 유리창 너머 진열되어 있던 철인 ‘28호’를 정말 갖고 싶었다. 81년 당시 종이 각에 담긴 프라모델 ‘철인 28호’를 등·하교 때마다 군침을 흘렸다. 천 원짜리였다. 10원주고 띄기를 먹고 50원짜리 핫도그를 사먹던 그 시절에 천원은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놈을 사고야 말았다. 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삼촌들 중 한 분일 듯싶다.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당연히 ‘철인 28호’를 지명했다. 근처에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았으나, 결국 멀리 떨어진 학교까지 손을 잡고 끌고 가 사고야 말았다. 달리는 기차를 맨손으로 세우는 괴력의 로봇을 결국 손안에 넣었다.
 
딱지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놀이는 잘하지 못해서인지 재미가 없었다. 집에서 티비를 보거나 선물로 받은 만화영화 주제가 레코드를 틀어 놓고 듣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돈만 생기면 로봇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완제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본드를 붙이지 않아도 조립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진 조립식 완구를 유독 좋아했다. 처음엔 100원짜리 조잡한 것들을 만들었으나 그것들이 시시해지자 차츰 좀 더 좋은 것들을 찾게 되었다. 당시 조립완구의 최고봉은 단연 ‘철인 28호’였다. 이걸 손에 넣었으니 천하무적이 된 듯싶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였다. 8살짜리가 만들기엔 그놈은 정말 어려웠다. 무릎과 팔꿈치를 만드는데 관절 부분에 조그만 부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끼우기만 하면 붙는 조립품이 아니었다. 본드를 사용해야 했다. 사실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허벅지와 다리를 연결하고 그 연결부위를 감싸는 장식 같은 자잘한 부분을 덧붙여야 했다. 그게 정밀하지 않은 국산 싸구려가 잘 안 맞는 것이다. 누군가 붙잡고 만들어 달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완제품을 가지고 논 기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놈은 거기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프라모델에 대한 사랑은 계속 됐다. 최고의 메카닉 프라모델은 건담이다.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건담은 감독을 달리하면서 시리즈를 거듭해 왔고, 그 때마다 완구 및 캐릭터 사업으로 더욱 큰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크와 건담 시리즈를 차례로 만들어 책상 위 한 편에 진열해놓는 취미는 어머니 성화 때문에 끊기고 말았지만, 프라모델을 보면서도 정작 영화를 보지 못했던 아쉬움은 나이 30이 넘어서야 해소시킬 수 있었다.


메카닉의 역사

 
필자는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 중에서 메카닉물을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메카닉물은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인양 터부시 되고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슈퍼 그랑죠’를 보고 있는데 한심하게 쳐다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확실히 ‘슈퍼 그랑죠’는 좀 유치하긴 했다. 하지만 끔찍이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그걸 맛있게 요리하든 맛없게 요리하든 그 음식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전히 손이 간다. 필자의 메카닉 사랑은 그런 이유다.

  어렸을 땐 최고 힘센 로봇이 무엇인가가 가장 궁금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최초의 메카닉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지금은 당연하게 로봇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을 하고 있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언제부터 사람이 메카닉에 올라타거나 들어가 조종을 하기 시작했을지 궁금해졌다.
  최초의 메카닉은 철인 28호다. 이 작품은 1956년부터 만화잡지에 연재되었는데 이것을 흑백으로 1963년에 첫 방영을 했다. 물론 일본에서. 그리고 1980년에 이전 철인 28호와 구분하기 위해 ‘태양의 사자 철인 28호’라는 제목으로 2기 작품이 방영되었다. 프라모델로 나온 것은 흑백이 아닌 칼라화면이 곽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바로 1980년에 나온 모델인 것이다. 철인 28호는 사람이 안에서 조종하는 로봇이 아니다.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의 영원한 친구 마징가 제트가 나왔다. 일본에서 1972년 12월 첫 방영을 한 후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우리나라 MBC에서 방영이 되어서도 주제가와 더불어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국민 로봇이 되었다.

 
철인 28호를 시작으로 시작된 메카닉 애니메이션들은 마징가 제트 전에는 그저 맨손 맨발로 토닥거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마징가제트의 출현이다. 직접 로봇을 조정한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로봇 본체와 합체를 한다. 무엇보다 신나는 액션기술을 선보였다. 마징가는 로케트 주먹을 날리고 비너스는 가슴폭탄을 날린다. 가슴에선 빔이 쏟아진다. 철인 28호가 방영된 이후 거의 10년 동안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나, 마징가제트를 필두로 바로 슈퍼로봇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여러 로봇 히어로들이 나왔으나, 역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다가 드디어 리얼 로봇시대의 막을 연 대작이 1979년에 탄생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기동전사 건담’이다. 찬란하다는 표현이 유치찬란하기만 하지만, 글에다가 건담이라는 글자에 금칠을 하거나 반짝 반짝 빛나는 이펙트를 줄 수도 없고 딱히 들어맞는 표현도 생각이 안 난다.


프라모델 산업과 애니메이션의 대성공 신화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산업은 둘 간의 성공을 촉진시키는 촉매역할을 한다. 과거에 우리는 주변에서 ‘양배추 인형’이 새겨진 시계라든가 ‘요술공주 밍키’ 신발이라든가 둘리가 그려진 필통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어린 시절 오매불망 사랑했던 프라모델들의 90프로 이상은 바로 ‘건담’이었다.


  1979년 건담시리즈가 시작된 이후 극장판을 포함 올해 방영된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까지 꾸준히 시리즈가 나오고 그 때마다 새로운 모습의 프라모델이 쏟아져 나왔다. 무려 30년이다.
  티비에 방영된 적이 없어 애니를 볼 수 없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습의 건담이 이름을 바꿔가며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립하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지 이 완구의 실제 배경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예전 로봇대백과에 나왔던 작은 지식으로 아무로 레이와 샤아의 모습에 익숙했고 건담과 자크가 서로 싸우는 관계라는 것만 아는 정도였다. 그것조차도 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나이 30이 넘어 건담이란 애니를 직접 접하게 됐을 때, 정말 이런 애니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원통한 기분마저 들었다. 제일 많이 만들고 점점 화려해지는 건담을 만들어 왔으면서 -주머니 사정상 비싼 건 쳐다도 못 봤다- 정작 이 재밌는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니.
  아무튼 건담의 성공은 곧 프라모델의 성공으로 직행했다. 심지어 애니메이션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땅에서 프라모델만은 꿋꿋이 팔았으니 말이다. 아~! 혹시 비디오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80년대 초 비디오 플레이어는 보통 서민들은 꿈도 안 꾸던 아이템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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