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울기관차 노보/2009년 6월 노보'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9.06.12 철도박물관에 가자 (6)
  2. 2009.06.11 지금 황작가와 황시인을 생각한다 (1)
  3. 2009.06.11 닥치고 단협준수
  4. 2009.06.11 인건비 비중 57%의 진실 (1)
  5. 2009.06.11 아! 노무현 (1)
  6. 2009.06.11 시작은 작고 미약하였으나
  7. 2009.06.11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아라
  8. 2009.06.11 삼일 아파트
  9. 2009.06.11 [포토 갤러리] 밥상공동체
  10. 2009.06.11 [편집자 서문] 자, 이제 반격입니다

기관사 류기윤 | 조합원

  이번 달 저의 주제입니다. 철도사람들에겐 전혀 인기가 없는 철도박물관은 87년도 겨울에 개관을 했고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해마다 한두 번 이상은 기회가 되면 들르고는 합니다. 전에는 오전에는 철도박물관을 보고 오후에는 수원에서 출발하는 수인선열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부천으로 돌아오는 코스였었습니다. 지금은 수인선이 없으니 저수지를 보는  걸로 변경 했습니다.

  아쉽게도 지난 20년간 전시물에 있어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 87년이면 철도현장 자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의 형편이었고 최초 전시차량 중에 수인선동차와 니가다동차 비둘기 통일호 객차는 멀쩡히 운행하는 마당에 박물관에 보내졌으니 굳이 철도박물관을 찾을 필요도 없던 전시물이었고 이는 없는 철도살림에 궁색하게나마 몇 대 보내 구색 맞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후 들여온 전시물로는 폐차될 뻔 했다가 가까스로 전시된 3100대기관차와 철도동호회의 집단민원으로 남겨진 EEC선두차가 있고 전동차는 정비창에서 낡았다는 이유로 몰래 차량번호를 바꾸고 엉뚱한 차량을 전시했다가 들통이 나 결국 최초 도입한 1001호 전동차로 교체되는 곡절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폐차되는 기관차들을 형별로 이곳에서 보관했으면 하지만 지금은 부지문제로 더 이상 기관차를 도입하기가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 대부분이 3200대로 개조되었지만 극히 일부는 3100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뒤에는 차량번호를 바꿨다가 들통이나 제대로 바꿔 전시한 전동차가 보입니다.



  야외전시물의 압권은 단연 거대한 스팀기관차로 미카와 파시형이 한 대씩 전시되어 있습니다. 파시(퍼시픽)형은 여객열차용으로 미카(미카도)형은 화물열차를 견인하던 대표적인 한국의 기관차로서 보존상태가 매우 좋습니다. 그밖에 문화재로 지정된 귀빈객차가 두 대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화물기관차 미카형 기관차. 여객용의 파시형에 비하면 동륜의 크기가 작아 비교가 되는데 파시형 기관차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둘을 비교하기 좋습니다. 오른쪽엔 박물관에서 보관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본제 니가다 동차로서 최초 개장당시 전시할 차량부족으로 저런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故 김재현기관사의 제복



  실내는 2층 전시실로 제법 짜임새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철도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엔 보물이 잔뜩 숨겨져 있습니다. 한국전쟁당시 미군특공대를 수송하다 순직하신 故 김재현 기관사님의 전시관이 있어 직업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사진과 제복 승무수첩을 불 수 있습니다. 대전 하선을 출발하여 언덕 막바지쯤에 대전 지하철기지가 있고 상하행 중간에 서있는 순직비가 있는데 바로 이분이 주인공입니다.



▲ 귀중한 유물인 경인선 개통당시의 통표


  기관차가 새겨진 동판이나 열쇠고리로 제작된 개통기념품이나 1950년대 열차다이아 그리고 권위적인 승무원의 휘장 완장과 신호뇌관 같은 휴대품도 있고 다양한 종류의 열차나 침대나 별실 같은 사라진 객차의 흔적도 승차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의 수색조차장 구내 배선도의 일부입니다. 한때 동양 최대란 말이 허언이 아닐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가좌역서부터 화전역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입니다. 사진의 맨 위에 원형의 기관고가 보이는데 이곳이 예전 서울기관차로서 지금의 북쪽 방호벽을 지나 삼각선쪽에 적어도 96년도까진 건물이 남아 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기관구에서 화전역으로 따라가다 보면 점선이 교차하는데 이곳도 현재 두 개의 터널로 남아서 위쪽 터널은 자동차도로로 아래쪽은 굴처럼 입구만 남아있습니다.



  용산선의 시각표를 보면 용산-원정-미생정-공덕-동막-서강-세교리-방송소앞-당인리-서강-신촌-아현리-서소문-경성으로 운행을 했습니다. 신촌과 서울 사이에 역이 두 개나 더 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지금으로선 도무지 답이 않나오는 이 노선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승무원 휴대품이던 신호뇌관과 심호염관 폭약들


  이제 선배님들도 시험에 늘 나오던 종별방호 가물가물 하실 것 같네요
 



  시각표가 뜻 깊은 것은 6300대로 이름 바꾼 구 7000호대 사진이 있습니다. 15대에 불과했고 90년대 말 전량 폐차되는 바람에 지금도 귀한 사진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 승무원 뱃지




가슴에 다는 승무원휘장으로서 이후 옷소매에 직책을 표시하는 걸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폐차된 증기기관차의 폐찰들이 몇몇 보관되어 있습니다. 스팀기관차를 아는 대로 꼽아보면 ‘파시 미카 마터 소리 터우 사타 텐휠 발틱 모걸 푸러 시그 아메’ 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카1∼7 파시1∼5 등등 가지치기까지 꼽으면 증기기관차의 종류는 상당한 편이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정리가 없는 실정입니다. 이 또한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보존 처리된 대부분이 파시와 미카형인데 비해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타 기관차로는 교육원의 이 터우형이 유일합니다(협궤차량 제외)



  이 기록표를 보면 87년도부터 경부선을 4시간 10분대에 운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4시간50분대에 운행하니 1969년 수준으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틸팅열차가 3시간52분이면 경부선을 주파한다’던 기사가 언론에 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제 홈페이지에 ‘80년대에 그것도 선로도 나쁘던 시절에 이미 4시간 10분대에 운행했는데 엄청난 개발비를 들여 만든 차량이 20년 전과 비교해서 고작 20분도 줄이지 못했으니 웃기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이게 거기까지 들렸던 모양입니다. 그 후론 쪽팔려서(?) 그런 건지 그런 황당한 자랑은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철도박물관은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은 박물관으로도 꼽혀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또 이색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합니다. 철도 사람들 중엔 입장료 500원이 너무 비싸서 의외로 박물관에 가볼 기회를 잡지 못하는 분들 많습니다. 또 가본들 볼게 없다고 여기시는데 꼼꼼히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도 전라도 곡성에 철도마을이 있어 이곳에도 기관차들과 객차들 그리고 비록 가짜 스팀기관차이지만 구 전라선의 백미라 할 섬진강변을 운행하는 관광열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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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심형대 2009.09.21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엉망이야

  2. 한제희 2010.04.1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4학년인데 거기로가려고 하는데정보좀더주세요..........

  3. 한제희 2010.04.13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4학년인데 거기로가려고 하는데정보좀더주세요..........

  4. 한제희 2010.04.13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발요

    • 쉬워요 2010.04.21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기도 의왕에 있는 철도대학으로 가시면 철도박물관이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wwww.naver.com BlogIcon 김용국 2016.08.14 0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엉망이야



  정창식 | 조합원


▲ “우리답게 싸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구내 모습




그 시절에는 그랬다.
유혈이 낭자한 홍콩 느와르가 되었건, 키득거리며 숨어보던 애마부인이 되었건 영화를 보고 싶으면 모두가 기립하여 왼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한국민의례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새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는데, 그처럼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우리를 주저앉게 하고, 통제하던 씁쓸한 현실을 풍자한 시인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반들거리는 얼굴을 한 양촌리 이장 둘째 아들에게서 과거를 다시 보았을 것이다.

지금 자유는,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아니라 흥행영화 ‘워낭소리’에 광분하는 이명박 정권의 천박한 문화 정책은 어떠한가? 정신적 자유를 표현하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에 대해서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철저한 규제를 가하고. 정반대로 소유의 자유, 재벌의 자유, 대기업의 자유, 족벌의 자유에 대해선 무한한 자유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지금은,
심각한 모순과 훼손된 자유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황석영작가의 궤변보다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과 황지우 시인의 저항이 훨씬 ‘예술스럽다.’ 예술가들이야 말로 사회와 시대의 자유에 대하여 가장 예민해야하지 않은가.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 김수영문학상>


▲ 문화부의 표적감사에 항거하기 위해 사퇴한 황지우 총장 사태에 항의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의 예술적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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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애독자 2009.06.12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월것인줄 알았더니 6월 것이네. 게으름은 누구도 못말린다더니 잘 보았어요.
    지난 번 기형도 시집 사봤는데 이번에도 사볼끄나!


권석훈 | 조합원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의 각국은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이라는 사상이 지배하게 되고, 시장 경제 체제와 사유재산의 절대보장, 계약에 있어서의 누구의 간섭과 통제도 없다는 기본원리에 의한 사회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발생한 근대 시민법은 무제한의 소유권보장과, 모든 계약에 있어서 국가나 제 3자가 개입하지 않는 계약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사용자 1인과 노동자 1인은 각자가 평등한 개인으로서의 계약 당사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만들어진 근대시민법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면서, 자본가들에겐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해주었지만, 노동자들에겐 16시간의 고된 노동에도 하루 밀빵 하나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의 저임금을 지급했으며, 일하다가 죽거나 다쳐도 사용자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보상도 받을 수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노동자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거리의 부랑자로 내몰리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였음에도 국가는 이를 수수방관만 하였다.

▲ 1903년 미국 탄광의 어린 노동자들



  이러한 초기 자본주의 체제에 불만이 고조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단결하여 노동조건의 향상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이러한 행위는 사회 질서를 해치는 심각한 불법행위로 간주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강한진압과 탄압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레닌헌법과 바이마르 헌법의 탄생
 

  이후 자본가와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노동운동은 계속되었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혁명사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러시아에선 혁명이 성공을 이루고 레닌헌법이 탄생한다. 이렇게 탄생한 레닌헌법은 이후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헌법으로 채택 된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직시한 주변국가들 의 자본가와 정치가들 은 체제의 붕괴를 두려워하여,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를 경제적 사회적 약자로 인정하여 노동자들에게 노동기본권을 부여하고, 자본가들에겐 사적 재산권의 남용을 금지하며 공공의 복리에 맞게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급적 타협안을 제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독일에서 바이마르 헌법이 탄생한다. 바이마르 헌법은 이후 우리나라와 같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헌법으로 채택되고 각국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특별히 보호하기 위한 노동법을 제정하게 된다. 우리헌법 또한 노동기본권 보장과 적정한 소득분배 경제력의 남용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혹 우리 주변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내돈벌어서 내가 마음대로 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고 역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아직도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현대 자본주의는 내 돈이지만 내 마음대로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헌법
제33조 ①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제119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단체협약의 의의와 성질

  이번 글의 주제는 단체협약의 의의와 그 성질에 관해서 인데 먼저 노동기본권을 얻기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개 과정을 미리 소개 할 필요성을 느껴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단체협약이 인정되기까지의 고난의 역사를 한번 느껴보자고 한 의도이다.

  단체협약이란 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 단체 간의 단체교섭의 결과로서 근로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에 관한 사항과 노사 간의 제반권리. 의무에 관한 사항을 합의하여 서면화한 것을 말한다.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으로는 국가가 직접 규율하는 헌법과 노동관계법이 있으며, 노사가 스스로 체결 또는 작성하여 규율하는 노사 자치규범(근로계약, 취업규칙, 규약, 단체협약 등)이 있다. 국가가 직접 규율하는 규범으로써 헌법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국가의 기본법 이자 최고 규범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며, 노동관계법은 국가가 노사 관계를 직접 노동조건 및 노사관계의 최저 라인을 설정하고 그 규범의 준수를 강제 한다.
  노사자치규범으로는 노동자 개인과 사용자가 체결한 근로계약, 사용자 일방이 작성한 문서인 취업규칙(사규, 복무규정, 보수규정 등),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교섭하여 체결한 단체협약이 있다. 이중 단체협약은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처럼 일방적이거나 개별적이 아닌 단체와 사용자가 교섭하여 체결하였다는 점에서 그 어떤 사규나 규칙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 가령 단체협약에 위배된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의 조항이 있다면 이 조항은 무효라고 한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3조 (기준의 효력) ①단체협약에 정한 근로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에 관한 기준에 위반하는 취업규칙 또는 근로계약의 부분은 무효로 한다.
②근로계약에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 또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무효로 된 부분은 단체협약에 정한 기준에 의한다


단협위반시 형사처벌까지 부과 가능

  단체협약은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체결한 계약의 성질을 갖기도 하지만, 위반 시 손해배상의무만 부과시키는 일반적인 계약과는 다르게 형사적 처벌도 가능하다. 예컨대 일반 상거래 계약이나, 주택임대차 계약 같은 경우 위약을 하면 위약금만 물리면 끝이지만, 단체협약위반의 경우엔 형사처벌까지 부과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실질적인 준수의무를 지게 하기 위하여 행위자인 법인에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대리인 또는. 사용인 기타의 종업원에 대해서도 같이 벌할 수 있는 양벌규정을 두고 있다. 즉 행위자인 한국철도공사에만 형벌을 부과하면 그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공사의 이름으로 행위를 했으나 그 실질적인 행위를 한 개인에게도 형벌을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제92조 (벌칙)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01.3.28>
1. 제31조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체결된 단체협약의 내용중 다음 각목의 1에 해당하는 사항을 위반한 자
가. 임금·복리후생비, 퇴직금에 관한 사항
나. 근로 및 휴게시간, 휴일, 휴가에 관한 사항
다. 징계 및 해고의 사유와 중요한 절차에 관한 사항
라. 안전보건 및 재해부조에 관한 사항
마. 시설·편의제공 및 근무시간중 회의참석에 관한 사항
바. 쟁의행위에 관한 사항
2. 제61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조정서의 내용 또는제 68조 1항 의 규정에 의한 중재재정서의 내용을 준수하지 아니한 자
제94조 (양벌규정) 법인 또는 단체의 대표자, 법인·단체 또는 개인의 대리인·사용인 기타의 종업원이 그 법인·단체 또는 개인의 업무에 관하여 제88조 내지 제93조의 위반행위를 한 때에는 행위자를 벌하는 외에 그 법인·단체 또는 개인에 대하여도 각 해당 조의 벌금형을 과한다.

   무엇보다 단체협약은 전체 노동자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결실이며, 사용자 또한 협약이 체결되기까지 철치 부심 많은 고민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이렇게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면 양 당사자는 신의와 성실로써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지켜야만이 협약의 유효기간동안 노사 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작금으로까지의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항상 어느 특정한 일방에서 줄기차게 노사 간의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를 자행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좀 더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도발이다. 올해에 철도노사 간 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만 봐도 그렇다. 진정 노사 간의 평화를 깨뜨리는 어느 특정한 일방이 누구인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배우자 음식솜씨 없다고 남에게 부엌을 넘기나

  과거 직영식당의 식사 질에 관한 불만의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오히려 용산 같은 외주식당이 나은데 그냥 외주화를 주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안다. 식사질의 문제는 식당 직영화의 당위성을 뒷받침할 논거일 뿐이지 식사 질의 높고 낮음의 문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식당문제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약이 심한 표현인줄은 모르겠으나 백년해로를 기약한 배우자의 음식솜씨가 형편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집 부엌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공사는 우리의 부엌을 합의도 없이 외주업체에 넘겼고 단체협약 164조를 통해 우리 부엌에 영양사와 조리사를 지원해주기로 했던 약속을 과감히 어겼다는 사실에 우리는 함께 공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본질이다.

단체협약 164조[식당운영]①공사는 직영식당중 1회 50인 이상식사를 제공하는 곳에 영양사 및 조리사를 배치하되 영양사를 채용할 때 조리사 자격증을 함께 보유한자를 채용한다.
②식당운영을 위한 공통적인 기준은 후생복지위원회에서 정하여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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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 前 철도노조 위원장




최근 공사에서는 5,115명에 달하는 인력감축 구조조정의 배경으로 과다한 인건비. 영업수익 대비 인건비 비중이 57%라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당장 57%라는 숫자가 먼저 들어오는 이러한 주장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닙니다. 과거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온 주장이 ‘인건비 과다론’과 이어지는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이였지요. 이러한 정부의 엉터리주장에 대해 노조는 물론이고 공사(당시 철도청) 역시 잘못된 숫자놀음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공사가 똑 같은 주장을 앞장서서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 철도현장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과연 우리 공사의 인건비 비중이 57%나 되는 방만한 수준인가? 아니면 이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어떤 비율(또는 비중)을 숫자로 나타낼 때에는 무엇과 무엇을 대비하는가? 에 따라 같은 사실관계에서도 각기 다른 %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대비하고자 하는 그 숫자는 정확한 것인가? 의 문제도 확인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러한 수치조작은 조중동찌라시의 2차 가공을 거쳐 국민들에게 왜곡 보도되고 우리 철도노동자들에게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인건비가 몇%라 카더라’ 라고 하는 숫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회계원리 상 인건비는 물건비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매출원가와 판매관리비에 포함되는 항목입니다. 일반적인 제조업과 달리 서비스업종의 인건비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인건비 비중을 흔히 종업원1인당 매출액으로 기준을 삼기도 하는데 같은 제조업의 경우에도 고가의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 종업원 1인당 매출액은 높아질 것이고, 저가의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 노동생산성이 높다하더라도 1인당 매출액은 낮게 나타날 것입니다.


예컨대 같은 신발을 제조하는 업종이라도 A사는 고무신을, B사는 가죽구두를 생산한다고 가정했을 때 A사의 노동자들이 B사에 비해 저임금에 노동생산성이 높다하더라도 종업원1인당 매출액을 기준으로 인건비 비중을 삼는다면 B사의 1인당 매출액이 훨씬 높게 나타날 것입니다. 고무신에 비해 가죽구두의 가격이 높기 때문에 같은 수만큼 생산을 하더라도 매출액은 당연히 B사가 높아지지요. 영업수익대비 인건비 비중으로 나타내어도 마찬가지 결론에 이릅니다. A사의 노동자가 저임금이지만 A사의 영업수익이 B사보다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A사의 인건비비중은 높게 나타나지요. A사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B사에 비해 종업원1인당 매출액은 낮고 영업수익대비 인건비 비중은 높게 나타나는 억울한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공사의 경우 일반제조업과 달리 인건비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종이며 영업수익=운임이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공공요금제도라는 두 가지 전제하에서 인건비의 수준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즉, 최소한의 수익률은 고사하고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운임을 기준으로 영업수익이 계상되고 이에 대비하여 인건비의 비율을 나타내거나 종업원1인당 매출액을 산출한다면 아무리 내부적으로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진행한다손 치더라도 일반 제조업에 비해 인건비 비중은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래의 표와 같이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는가에 따라서 그 비중은 달리 나타납니다. 57%가 되기도 하고, 31%, 34%가 되기도 하지요.


< 공사의 주장과 재구성 (08년 결산 기준) >


단위 : 억원, %

공사 주장

 회계원칙에 의거 재구성

영업수익 a

36,314

총수익(영업+영업외)d

62,251

영업비용 b

43,688

총비용(영업+영업외)e

57,111

인건비   c

20,779

인건비             f

19,285

a/c = 57.2

d/f=31

e/f=33.8

주: 인건비 총액은 공사의 자료에 따라 20,779억원에서 19,285억원까지 달리 나타나며 인건비에 어디까지를 포함시킬 것인가? 에 따라 차이가 발생함.


전문연구기관의 입장도 이와 같습니다. 노동부가 한국노동연구원에 의뢰한 ‘07년도 철도노사관계 실태분석 및 평가’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철도공사의 인건비 비중은 국내 동종 사업장의 경우보다는 현저히 낮고 국제적으로도 일본여객철도회사를 제외하고는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 비교 >


구분

철도공사

**지하철

**지하철

**지하철

일본

프랑스

독일

비율

36.8

58.1

88.9

80.5

31.8

57.0

51.9

 

주: 유럽 각국 자료는 NERA(국립경제연구소) 보고서를 인용(‘01년도 결산기준. 1EURO:1172.6원) 철도공사 자료는 ’04년도 결산 기준임. **지하철의 경우 자료의 악용을 막기 위해 **로 처리함. 자료: 건교부 06년 국정감사


이런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인건비 비중이 57%나 이르는데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수치조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조중동찌라시들의 ‘삼성전자 종업원1인당 매출액이 얼마인데 공기업 종업원1인당 매출액은 얼마밖에 안 된다. 그러니 민영화해라’ 라고 하는 무식한 주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경찰사장님이 경영을 모른다고 해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스스로 ‘우산사장’이기를 포기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욱 우울할 따름입니다.

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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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oo 2009.06.15 0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영훈 전 위원장님의 올려주신 글 잘보았습니다. 항상 건투를 빌겠습니다.



박흥수 | 조합원






88년, 21년 전이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올림픽을 치루고 우리나라가 재도약 하는 해로 기억하겠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패배주의와 낙담으로 시작된 한 해였다. 한 해전인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사회가 낡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사슬을 벗고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는 희망에 넘쳐있던 해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력적 통치에 맨몸으로 저항하며 거리를 뒤엎었던 학생들과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거대한 파도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런 민중들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사람들은 결국 정치인들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위기감을 느낀 수구 세력은 역사를 되돌리려고 집요하게 저항했고 야당 정치인들은 분열했으며 노동자, 시민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진보적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불린 87년 6월 항쟁은 80년 광주학살의 파트너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수많은 시민들은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확정에 좌절했고 88년 취임식을 보면서 허탈해 했으며 희망이란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야말로 스타였다. 폭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거대한 전국적, 전세대적 저항조차 아무 쓸모없다는 패배의식의 바다 속에서 불빛을 비추는 등대가 하나 있었으니 노무현 국회의원이었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재벌 총수에 설설기는 파렴치한 국회의원들 속에서 당당하게 호통치는 노무현을 통해 시민들은 몇 년 묵은 채증이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언제나 통치의 대상이고 동원의 대상이었던, 단 한 번도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민들에게 오랜만에 정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인기는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반 민중성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었다. 당시 여중생들까지도 노무현 아저씨의 카리스마에 환호했던 일들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는데 한반도를 뒤덮었던 노무현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패배의식의 바다 속에서
불빛을 비추는 등대가 하나 있었으니


  노무현은 한국의 정당정치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철옹성같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성공지상주의, 철저한 위계질서와 권력에 대한 추종 및 복종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특히 한국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꾀하는 세력들은 보수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당활동이 원천봉쇄된 상황에서 시민들의 진보적, 민주적 지향을 정치적으로 담보할 수 없었다. 결국 민중들의 열망은 보수 야당의 정책으로 굴절되어 수렴되었는데 그나마 이 보수 야당에서 상대적 진보성을 갖는 사람들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었던 미국, 또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공개적 반대가 현실화 되었던 86년 5.3인천사태도 그 발단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인천 지구당 현판식이었다. 주안역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진압경찰과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제축출, 파쇼타도라는 구호아래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한 시위를 보수언론은 야당의 지구당 행사를 빌미로 한 좌경용공세력의 국가전복음모로 규정햇다. 이 시위의 배후조종혐의로 현 한나라당의 실세로 꼽히는 이재오전 의원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처럼 민중의 실질적 이해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없는 불운한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에서 그나마 보수야당의 벽을 깨고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 노무현이다.

  한국의 정치사는 이합집산의 역사였다. 어제까지 가졌던 신념을 오늘 헌 신짝처럼 버리는게 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 온갖 구차한 핑계를 대며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 했다. 군사독재정권과 사생결단으로 대치하던 사람들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독재정권에 투항했다. 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의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하던 김영삼이 계파 정치인을 이끌고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을 때 한 사람 목청 높여 반대를 외쳤던 이가 있었으니 노무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마다 노무현은 스스로가 계란이 되어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모두가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무모한 도전이라 일컫는 일에 스스럼없이 몸을 던졌다. 한나라당 일색인 경상도에 지역감정을 깨겠다고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가? 결국 계속되는 실패는 노무현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주는 기름진 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미친 노무현의 진심이 국민들에게 미치게 된 것이다.


노무현후보의 당선은 시대정신의 승리였고
한국사회의 한걸음 진전을 약속하는 의미있는 발걸음

  87년도부터 이른바 진보진영은 독자적으로 후보를 냈다. 진보진영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조차 발견할 수 없는 군사독재정권과 그 전통을 물려받은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이 한국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대립하고 있는 민주당으로 통칭되는 야당역시 국민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사수에 국민의 이름을 도용하는 세력으로 보고 진정으로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에 나서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정치권 진출은 반공주의의 덧칠과 지역주의의 완고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제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커나가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진보진영의 정책에 동의하더라도 실제 투표에서는 사표방지 심리나 비판적 지지라는 명분아래 차악을 선택하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진보진영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내세워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후보로 나선 노무현은  그 전의 어떤 후보보다도 진보진영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비록 보수야당의 후보지만 상대적 진보성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고 인간적 매력조차도 진보진영의 후보를 능가했다. 또한 대통령 출마 선언과 민주당내의 경선과정, 대통령 선거운동기간 전반에 걸쳐 마치 한편의 감동적 드라마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공신화를 연출해 냈다. 후보 경선과정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하고, 후보 결정 후 지지율 하락에 따른 후보교체론에 휘둘리다가 막판 정몽준과의 통합과 분열이라는 손에 땀을 쥐는 시나리오 속에서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던 사람의 상당수가 막판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기자회견을 보면서 위기감 속에 노무현으로 투표했다. 끝까지 진보후보 권영길을 지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한나라당 지원군이라는 노골적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으로 한 없이 부풀어 올랐다. 진보후보를 찍었든 노무현 후보를 찍었든 간에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시대정신의 승리였고 한국사회의 한걸음 진전을 약속하는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공적인 산업부분조차도 자본의 영역으로 포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에 감히 공공성을 이야기 하며 사유화중단을 선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이며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노무현 당선의 효과는 당장 철도에서 가시화 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철도 민영화에 대해서 국가기간산업인 네트워크 산업에 대한 섣부른 민영화는 중단한다는 방침이 대통령인수위에서부터 발표되었다. 민영화만이 살길이라며 철도구조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철도산업의 사유화를 추진했던 건교부는 쓰디쓴 일보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교부는 새로운 반격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는데 이것이 바로 철도구조개혁법이었다. 2003년 4월20일 철도노사는 파업돌입을 앞두고 합의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내용이 “철도개혁은 철도의 공공성을 감안하여 기존 민영화 방침을 철회하고 대안을 모색한다.”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앞의 내용은 이미 인수위부터 이야기 되어온 것이었지만 정부와 노동조합 간에 명문화된 합의서 양식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이윤확보를 위해 기존 국가가 담당했던 공적인 산업부분조차도 자본의 영역으로 포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에 감히 공공성을 이야기 하며 사유화중단을 선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이며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건교부는 착실하게 철도노조에 반격을 준비했고 청와대에 벽을 쌓아 소통을 막았다. 6월 철도산업 구조개혁법안을 강행처리하게 되면서 결국 철도노사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명백한 420합의의 파기였다.



  420합의서의 “철도개혁은 철도노조 등 이해당사자와의 충분한 논의와 공청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한다는” 내용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일방적 법안처리로 철도파업을 유도한 건교부의 행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가 무너지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정부부처 기자들이 출입처를 상대로 시쳇말로 어디가 더 막강한 기득권을 갖고 강한 파워를 내느냐를 따지며 마피아란 표현을 쓴다. 가장 커다란 파워를 가진 곳은 역시 돈을 다루는 부처이나 건교부마피아나 교육부 마피아 등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켜내는데 탁월한 부처도 알짜베기 부처로 손꼽힌다. 결국 노무현의 실패는 이들 정부부처 권력기관의 마피아적 특권을 무장해제 시키지 못한데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탈 권위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눈에 띄는 검찰이나 국정원등의 권력기관에 집중 되었지 수십 년간의 이권유지를 통한 자가발전의 정부부처 탈권위화에는 미쳐 손을 쓸 수 없었다.

  철도노동자가 노무현에게 실망했다면 노무현은 철도노동자에게 실망했다. 철도노동조합이 요구하는 민영화반대도 합의해 주고, 여러 가지 내용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경청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막 출범한 정권이 제자리도 잡기 전에 국가기간산업망인 철도를 마비시키는 행위는 대공장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의 전형이라고 본 것이다. 철도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서민의 정부라고 하는 참여정부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폭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며 노무현이라고 별거 없다며 정권에 대한 실망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거 철도 해고자가 발생하고 손해배상이 청구되는 모습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철회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교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철도 개혁의 방해자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확대재생산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실패 가림막으로 삼으면서 철도의 공공성 강화노력을 무산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철도는 여러모로 아쉬운 한 해였다.


노무현의 불행



  “반미면 어때”라는 신조를 표명했던 노무현대통령에 대해 미국을 어버이 모국으로 모시는 수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극단적 공포는 극단적 공격성향으로 나타나듯이 보수진영은 노무현에 대해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전 대통령과 특별히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었지만 무리(?)없이 미국의 요구에 응해주었고 결국 이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자존심 상하는 논리로 옹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자 과오는 한미FTA체결이다. 미국이 다급하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신념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한미FTA는 자본과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미운 노무현이 그래도 제대로 한 일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고 농민과 서민,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끝내 민중을 배신하고 신자유주의에 홀딱 벗어준 최악의 정책이자 용서할 수 없는 과오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한미FTA추진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노무현대통령 집권시기에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세상을 끝까지 지배할 것 같은 환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출신 일변도의 경제학자와 경제부처의 상상력이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전제조건 없이는 한 치도 발휘될 수 없는 반쪽짜리였다.

  과거 일제시대에 한 동안 항일운동에 열심히 매진했던 사람들이 변신을 거듭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에 대해 해방 후 인터뷰에서 왜 그랬나 이유를 물어본즉 이들의 대답은 이랬다. “일본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무모한 독립운동 보다는 영원한 제국에 협력해 식민지일지언정 조선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게 좋지 않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기가 질렸던 것이 아닌가?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대두되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전도사들조차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에 반성하는 지금의 시대정신이 조금이라도 노무현대통령의 집권기간에 투영되었더라면 FTA라는 다자간 무역협상을 통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하급지위로 한국경제를 편입시키는 오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 가는 길



언어의 거꾸러짐이 일반화된 이명박 시대.

공기업 선진화? - 공기업 사기업에 팔어 먹기!
산업합리화? - 노동자 집단해고!
사교육대책? - 무한경쟁 몰입시키기!
4대강 살리기? - 운하로 강죽이기!
합리적 세금조정? - 부자들 세금 깍아 주기!
실용적 대북정책? - 개성공단 폐쇄위기, 전쟁위협 증가!
전직대통령 극진예우? - 국세청, 검찰 동원해서 전직 대통령 조지기!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삼성비리를 밝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애써 입을 막아버린 검찰이 술 취해 앞좌석 의자를 발로 차 항공기에서 쫓겨난 전력이 있는 상식이하의 인간 박연차의 말은 토씨하나 안 빼고 월드컵 중계 방송하듯 공표했다. 조중동은 신나게 지면을 채우며 저주의 악다구니를 퍼부어댔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 였다. 국민들이여 찍 소리 말고 통치를 받아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살아라. 어떻게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쓸데없는 일이다. 노무현 같은 인간도 이렇게 박살나지 않느냐?
  피지배자의 가장 큰 덕목은 지배자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피지배자로 태어난 몸. 자유를 원하는 자! 고통만이 너의 몫이다!
  결국 노무현은 또 다시 계란이 되길 작정했다. 이 끔찍한 세계, 한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지배계급의 질서에 도전했다가는 가차없이 린치를 당하는 세계에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 되는 세상에서 바보 노무현은 바위로 날았다.

  추모기간 내내 대한문 앞 분향소의 추모공간과 서울시청 앞 광장을 막은 경찰버스는 이 시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자화상이었다. 공포에 질린 정권의 초라한 모습과 슬픔을 삭이며 무관심 했던 자신에게 자책하는 시민들의 앙다문 입과 대비되며 역사의 또 한걸음 진전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영결식 길에 수십만의 인파속을 서서히 빠져 나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은 눈물만이 흐른 길은 아니었다. 이 탐욕의 시대에 사람이 숨쉬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겠다는 다짐의 길이요 함께 싸우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속죄의 길이요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약속의 길이며 축제의 길이었다. 이 축제의 길에 잠시 누르던 카메라 셔터를 멈추고 영구차에 손지장을 찍었다.
 
  작은 불꽃을 일으켜준 인간 노무현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PS. 국가권력이란 공평무사하게 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지만 결국은 지배계급의 이해를 실현하는 장치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노무현은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그 공과가 어떻든 국가권력의 작동 시스템 속에서 고군분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소통공간에 과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진보정권이었나”를 되물었다고 한다.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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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2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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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균 | 서기지부 조사차장





prolog

5월 1일부터 식당 직영 사수를 외치며 안전운행투쟁에 돌입했으니 어언 한 달하고 10일이 되어간다. 투쟁의 진행은 안전운행투쟁이지만 그간 서울기관차가 진행해 온 투쟁의 8할은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데 쏟아 부은 듯 하다. 운영을 한다지만 이윤이 남지도 않고 인건비도 안 남고 마냥 적자만 보는 식당운영을 하고 있다. 도데체 이런 겁 없는 짓을 지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 달이 넘도록 밥을 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번 되짚어 보기로 했다. 


서기 주방장

  필자는 지부의 새내기 조사차장이다. 새로 일을 맡고 조사부다운 일을 한 거라곤 겨우 지부교번 만들어서 메일 보낸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지부조가 없어져서 내가 만든 지부교번은 한번 빛도 못 봤다. 얼마 전 우리 식당에 노조 위원장이 왔었다. 빨간 앞치마 두르고 미역국을 퍼주고 있었다. 귀현이 형은 열심히 계란을 부치고 있었는데, 위원장한테 나를 우리 주방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노조 수석 부위원장이랑 맥주 한 잔 할 때도 우리 지부장은 나를 주방장이라고 소개했다. 비록 세상에 빛 한번 보지 못한 지부교번이나 만든 게 한 일의 전부인 조사차장이라지만 한번 얼굴 보기 힘든 본조의 노조 위원장 수석 부위원장을 만났는데 나를 서기지부의 조사차장도 아니고 주방장이라고 소개하다니! 언제부터 서기지부에 주방장이라는 직책이 있었던가!
 


  그 시작은 작고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크고 비참하리라! 성경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서기 주방장 탄생은 정말 하찮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식당이 문을 닫고 처음엔 컵라면을 사다 놓고 라면에 밥, 김치를 내주었다. 식당엔 남아 있는 쌀과 김치가 넉넉하니 있었다. 고민할거 없이 컵라면을 떨어지지 않게 사놓고, 밥과 김치를 해주면 그만이었다. 우리 지부장은 ‘보신각’ 스티커를 잘 보이는 곳에 내놓으며 철가방 아저씨한테 바빠질거라고 넉살을 피웠다. 그 땐 그랬다. 그러다가 철이 형이 세끼 컵라면만 주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돼지고기 사다가 주방에 있는 김치로 국이라도 끓여놓으면 사람들이 밥을 잘 먹을거라고 했다. 국만 있어도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라면보단 낫겠다 싶었으리라.

  “한번 해봐라.”

  반찬은 김치하고 까놓은 양파가 가득 있었는데 그것 썰어다가 쌈장에 찍어 먹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 양파가 싱싱하니 맛있었다. 맵지도 않고.

  “찌개 하나 끓이는 거야 어렵지 않지!”
 
  국만......... 진짜 국만 끓여 놓으면 되는 거였다. 마트에 가서 장을 봐서 김치찌개를 끓였다. 대충 하는 거지 머! 맛있단다. 병수형이 큰 대접에 찌개를 퍼다가 밥을 말아서 연신 ‘좋다’를 연발했다.
  철이 형이 이젠 대놓고 꼬시기 시작했다.

  “계속 해라!”

  그 찌개를 철이형이 물 붓고 소금 넣어서 다음 식사 때 내놓았고 다음 배식 땐 희주형이 라면 스프 넣어서 새로 끓였는데 내가 한 찌개가 제일 맛있었단다. 이 사람이 펌프질 하고 있구나! 암튼 맛있다는데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맛이 없었다. 김치가 맛이 들지 않아 배추국에 돼지고기 많이 풀어서 밍밍하기만 했다. 묵은 김치가 필요했다.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묵은 김치만 있으면 훨씬 맛있을 텐데. 나의 주장은 묵은지를 사서 찌개를 끓이는 거였다. 철이 형 왈

  “야~ 무슨 요리 경연대회 나갈 일 있냐? 대충 해라!”
  “아~ 주방에 한번 있어봐! 사람들이 먹는데 맛없게 먹으면 얼마나 맘이 아픈데!”
 
  끝내 묵은지는 사지 못했다. 김치를 새로 사기 시작하면서 밖에다 며칠 묵혀서 찌개 끓일 김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슬슬 김치찌개 하나로는 부족해졌다. 반찬도 김치랑 양파로는 부족했다. 쇠고기를 사다가 푸짐하게 미역국도 끓이고 제첩국도 끓이고 북어국도 끓이고 바지락 사다가 된장국도 끓였다. 지부장은 연신 ‘푸짐하게 먹이자!’를 연발했다.
  또 철이형이다.
 
  “야~ 보니깐 국에다가 반찬하나 먹을 거 있으면 밥 잘먹겠더라.”

  어느 샌가 국 하나에 1식 5찬 6찬씩도 내놓게 되었고, 나는 주방장이 되어 있었다.


요리에도 정신이 있다.

  하는 요리마다 전부 맛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경험 많고 솜씨 좋은 전문 주방장이 아닌 야메 주방장이기에 어려운 순간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정말 맘에 안드는 맛! 내가 먹어 봐도 맛없는 물건을 먹으라고 사람들한테 내놓는 것처럼 치욕이 있을까!


  지부장과 강철 등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대충 해라! 맛없을 때 비책이 하나 있단다. 화학조미료를 넣으면 된단다. 그러면 어쨌든 맛있으니깐 맛 없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온몸으로 항거했다. 우리가 식당 외주화를 반대하고 투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합원의 건강권을 위해 식당 직영유지를 주장하는 우리가 단지 야메라는 이유만으로 정신까지 화학조미료로 더럽힐 수는 없었다. 천연 양념만을 이용해서 요리를 하겠다. 고집을 부렸고 다행히 그 고집은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정말 힘든 유혹의 순간들도 있었다.
  무슨 국인가를 끓이고 있었다. 뭐가 빠졌는지 맛이 나질 않는다. 들어 갈 것 다 들어갔는데 맛이 없다. 이거 어떻게 하지? 쇠고기 다시다를 넣어? 연신 맛을 보면서 다시다의 유혹에 넘어갈 참이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 때 옆에서 민성이가 국대접에 담겨 있는 쇠고기 다시다에 숟가락을 꽂아 넣고는 나에게 권한다.

  “이거 넣어봐. 자~”

  순간 시선이 민성이의 손을 타고 올라가 얼굴에 꽂혔다. 웃고 있었다. 난 흠칫 놀랐다. 야릇한 미소! 맛없는 국 앞에서 고민하는 나에게 시원하고 유혹적인 해결책을 내놓으며 민성이는 야릇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화학조미료를 멀리하고 조합원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나의 다짐을 무너뜨릴 수 없다. 위험했다. ‘쇠고기 다시다’의 유혹이 민성이의 그 미소 한방에 싹 달아났다. 그 때 민성이는 아마도 선의를 가지고 건냈겠지만 나에겐 야릇한 유혹의 미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맛없어서 화학조미료의 유혹이 고개를 내밀곤 했지만 민성이의 미소를 생각하며 버티고 있다. 앞으로 내가 주방장으로 있는 한 절대 화학조미료를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짬버리기 투쟁

  밥 먹는 사람이면서 첫 번째 고민은 돈 문제였다. 처음엔 매일 5만원씩 적자라고 했다. 그 다음은 문제는 먹고 남은 음식쓰레기 처리문제였다. 그 전에 음식쓰레기를 가져가던 개장수 아저씨가 공주로 내려가면서 처리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옆에 있는 수색차량식당의 나래-이 업체가 우리 식당 외주 업체인건 설명 안 해도 아시리라-는 어디서 처리를 하는지 짬을 비우고 있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병권형이랑 봉기형이 말씨름을 하곤 했다. 병권이 형은 옆 짬통에 버리자고 주장하고 봉기형은 다른 곳을 알아보자고 했다. 다시 말하면 병권이 형은 나래를 짬으로 엿먹이자는 주장이고 봉기형은 치사하게 쓰레기가지고 그러지 말자는 주장이다. 행동파 병권이형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저녁 설거지랑 청소 마무리를 하고 짬을 한 바구니를 들고 가서 나래 짬통에다 버렸다고 짬 문제 해결했다고 큰소리를 쳤다. 같이 갔던 철이 형이 박장대소를 하며 상황설명을 해줬다. 짬을 들고 가 버리려고 폼을 잡는데 수색차량 조합원이 그 모양을 빤히 보고 있었는지 지나가고 있었는지 암튼 대놓고 버리면 들키는 상황이었단다. 철이 형이 들키면 좀 그러니깐 지나가면 버리자고 하자 병권이 형이

  “아니야! 이런 건 대놓고 해야 돼! 야~ 내가 너네 짬통에 짬버린다~!”

  이러면서 진짜 대놓고 옆 짬통에다 짬을 버리고 와서는 짬문제 해결했다고 큰소리 친 것이다. 식당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수색차량 조합원은 그냥 휭 하니 지나갔을 뿐이고. 소리 지른 사람은 멋쩍을 뿐이고.
  결국 이 문제는 최근에야 해결을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정문 앞 천막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분홍색 가운을 입은 수색차량 영양사가 씩씩 거리며 우리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 사무소 들어 올 일은 짬 문제밖에 없다. 직감한 나는 얼른 뒤쫓아 갔다. 벼락은 설거지 하던 봉기형이 맞았다. 영양사가 어제 짬을 가져갔는데 오늘 보니 다시 한가득 짬이 있더란다. 우리가 버리는 거냐며 따지고 있었다. 봉기형은 난 잘 모르겠다고 시치미 떼면서 나한테

  “네가 어제 짬버렸냐?”
  “아니! 난 모르는데.”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다가 봉기형이 넌지시 영양사한테 짬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힘 빠진 영양사는 친절하게 전화번호가 있다며 봉기형을 데려가 구청 소개로 알게 됐다는 업체 번호를 적어주었고, 이 업체에 전화하면서 결국 짬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봉기형이 우리가 버렸던 짬통이랑 비어 있는 짬통을 바꿔놓는 친절까지 베풀고 와서는 창피해 죽겠다며 투덜거린다. 병권형의 대놓고 짬버리기 투쟁은 결국 영양사의 항의와 봉기형의 오리발 내밀기, 업체와의 연결로 봉기형의 주장대로 마무리 되었다.


식당은 우리꺼다


  식당을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식당의 주인이 아니었다. 지금은 물론 우리가 밥하고 설거지하고 시장가서 장도 보고 짬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주인이다. 지부 임원뿐만 아니라 같이 설거지 하고 밥하는 조합원도 있다. 지내다 보니 일 잘하고 음식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못하는 사람도 있다. 못하는 사람들은 차분히 물어봐가며 일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특이한 사람이 하나 있다. 정동기!
  처음 시도해보는 닭도리탕을 해보려고 인터넷에서 맘에 드는 레시피를 프린트해서 주방에 걸어 놓았다. 닭은 씻어서 맛술과 후추 소금을 살짝 뿌려서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데 동기형이 왔다.
 
  “형 닭좀 썰어 줘요.”
  “알았어. 내가 조사불지!”
 
  동기형이 일을 시작했다. 닭을 자근 자근 쪼개 놓았다.
 
  “야~ 이거 닭 내가 조사놨다고 하지 마라. 너무 잘게 조진 것 같다. 그 담엔 머하냐?”
  “감자 깎아줘요.”
 
  난 부산하게 양념장 만들고 쪼개 놓은 닭에다 양념을 버무리고 있었다. 옆에서 동기형이 이거 썰면 되느냐고 묻더니 싹둑 싹둑 칼소리가 난다. 잠시 후 당근을 다듬고 썰려고 동기형 옆에 가보니 자잘하게 썰려진 감자가 눈에 띄었다. “형 감자까지 이렇게 조사불면 어떻게 하는겨! 일단 물어나 보고 하던가!” “왜 이렇게 하믄 되지! 먹으면 다 똑같은데.” 옥신 각신 하다가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같이 감자를 썰고 있는데 철이 형이 왔다. 동기형이 감자를 조사놔서 나한테 혼났다고 하니 어디 보자면서 감자를 뒤적거리다 동기형이 썰어 놓은 감자를 하나 집어들었다.

  “어~ 이거 머냐! 근데 동기야! 너 닭도리탕 안 먹어 봤냐?”

  요리가 끝난 후 동기형이 썰어 놓은 감자는 한 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국물에 다 녹아 버려 형체가 없어진 것이리라! 그나마 계란국은 동기형이 맛있게 끓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언젠가 부추전을 할테니 부추를 씻어 달라고 했다. 있는 부추를 전부 씻어 달라고 했다. 전부 잘 씻었다. 동기형이 이걸로 ‘전’ 부칠거냐고 물어 봤다. 그렇다고 하자 부추가 너무 많다며 반 정도를 갈라놓더니 말없이 부침가루를 집어 든다. 눈 깜짝할 사이 부침가루를 몽땅 부추위에 쏟아 부었다. 조금 저어 보더니. “부추가 적다.” 결국 모든 부추와 부침가루가 들어갔다. 이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른 쫓아가 봤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엄청난 양의 부추전을 하게 됐다. 부추를 남겨서 할 것이 있었건만. 쩝! 그래도 그 부추전은 맛있어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그 날 동기형 계란국은 역시 맛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지부임원 몇 명이 그나마 이제껏 식당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은 역시 함께 하려던 조합원들 덕분이다. 쉬는 날도 일 하러 나왔다는 조합원이나 틈나면 달려오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안되면 고생한다고 박카스나 비타500 아이스크림 민들레즙, 야쿠르트 등으로 힘내라고 격려해준다. 말로만 이라도 “니~들이 고생이 많다!” 연신 남발해준다. 이게 유행어라는 사실은 티비를 안보는 관계로 조금 후에야 알았다. 남들 흠잡기에 익숙하고 칭찬에 인색한 우리들에게 정말 좋은 유행어다.
  한번은 식당에서 일하는 임원들에게 고생이 많다며 권동오 기관사님이 ‘칸’ 야쿠르트를 네 개를 사다가 모금함 옆에 놔두셨다. 설거지에 여념이 없던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계속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옆을 보니 누군가 이 야쿠르트가 한 개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어? 뭐지?” 저기 앉아서 밥 먹고 있는 타소 승무원이 가져가는 걸 철이 형이 봤다고 했다. “뭐? 가져갈 때 얘기했어야지!” 옆에 있던 선욱이와 나는 분개했다.

  “아니 사람이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그걸 가져가냐! 2000원 내고 밥먹으면서 1000원짜리 야쿠르트를 배식하는 줄 알고 가져갔나?”

  철이 형이 그냥 조용히 하라며, 가서 얘기하고 야쿠르트를 가지러 간다는 나를 말렸다. 그러는 사이 반찬이 부족하다며 계란 후라이를 만들던 봉기형이 완성한 후라이를 후라이팬에 담아 그 승무원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와 철이형이 신이 나서 봉기형이 계란주면서 얘기를 할까 말까하며 보고 있었다. 당연히 가져 오겠지? 왠걸 친절하게 웃으며 맛있게 드시라는 둥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철이 형은 저 사람들 무안할까봐 그냥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내가 말하면 기분 나쁠 거라면서.  잠시 후 연충희 선배님이 다가와 고생 많다며 음료수를 건네 주셨다. 그러고 보니 타소 승무원은 둘인데 야쿠르트가 하나다.

  “또 하나는 어디 간거야?”

  그 때서야 철이 형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처음에 연충희 선배님이 먼저 야쿠르트를 배식하는 것인 줄 알고 가져가셨단다. 이미 반찬을 담아 자리에 갔던 그 승무원들이 그 모양을 보고 되돌아와 야쿠르트를 가져간 것이다. 철이 형은 연충희 선배가 무안해 할까봐 조용하라고 했던 것이다. 혹시 이 글 보시면 연충희 선배님 더 무안하실라나? 괜찮죠? 그리고, 계란후라이 들고 갔던 봉기형은 그 사람들이 야쿠르트 가져간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가지고 나간 줄 알았단다. 하여간 한참을 웃었다.




작지만 큰 투쟁

  식당 외주화 문제로 지부장 삭발과 안전운행을 시작하고 지부임원들은 고소고발에 이어 직위해제를 당했다. 단협에 명시된 조합원들의 복지를 축소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식당외주를 진행시키는 공사도 이해가 안되지만 이에 반발하는 지부의 반발도 거센 것이어서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심지어는 식당은 그냥 외주를 줘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나도 처음엔 조금 오바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사측의 대처가 영리해지면서 안전운행 투쟁의 효과도 미미하기만 하다. 중요한 건 사측과 노조의 기싸움에서 이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 먹거리는 우리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생존의식이다. 자기 집에서 남이 해주는 밥 먹는게 호사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자기 집에서 자기가 밥해먹고 싶어도 못 먹고 남이 해주는 밥만 쳐다봐야 하는 현실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상황이 딱 이런 상황이다.

  식당을 지키고 조합원들에게 밥을 거르지 않게 하기 위해 지부임원들은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 까지 식당을 지키고 있다. 5월 중순 너머까지의 일과를 보면 5시 기상해서 식당 문 열고 배식준비를 마치면 6시 30분쯤 된다. 자리를 지키다가 8시쯤 설거지를 시작해서 9시에 마치고 조금 쉰 다음 점심준비 시작하고 배식 준비가 끝나면 11시 반이다. 자리 지키다가 설거지가 많이 쌓인다 싶으면 한번 설거지 하고 두 번째 설거지를 마치면 세시, 네시부터 저녁준비를 한다. 7시부터 설거지 시작해서 마치면 8시 반이다. 임원들이 함께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수월해져서 6시에 아침 시작해서 8시에 설거지하고 9시면 끝난다. 10시에 점심시작해서 마치면 11시 40분에 끝나고 1시에 설거지 시작해서 2시 30분 쯤에 마무리. 4시부터 저녁준비해서 마치면 5시 20분 6시부터 설거지 시작해서 7시 30분쯤 마무리 한다. 바쁠 땐 중간에 담배도 못 피운다. 그러고 보니, 5월 31일 딱 하루 빼놓고 매일 배식을 했다. 또 동기형이 문제였다. 집회로 인해 저녁배식 때 자리를 비웠는데 그 날 저녁 동기형이 식당문을 잠그고 나왔다. 그리고 열쇠를 매일 넣어 두는 장소에 넣지 않고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다음날 식당 열쇠를 못 찾아 동기형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전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동기형이 가지고 간 것으로 치부하고 열쇠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었던 관계로 그날은 전면 배식이 중단되고 만 것이다. 덕분에 소중한 휴일을 보내기는 했다.
  어쨌든 식당에서 지부가 직접 밥을 해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피로는 쌓여가고 조합원들도 슬슬 지부가 식당을 운영한다는 데 대한 문제의식에서 점점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 안전운행 투쟁도 이 시간만큼 길게 이어지고 있다. 질지 이길지 장담은 할 수 없다. 경찰사장은 자기 입 밖에 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부류의 인간일 것이고, 그것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에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고 신중하게 만드는 것이고, 해야 할 말은 “그 입 닥치라!”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행동은 안전운행투쟁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지부임원들은 아침부터 열심히 식당 밥하기 투쟁과 안전운행투쟁을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 화물출근이다. 지부조 없어진 게 억장이 터지지만 한편으론 일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식당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밤출근하는 날이라도 오면 큰일이긴 하다. 정말 병가라도 내고 쉬고 싶은 심정이다. 내일은 좀 더 일찍 나와서 밥을 해야 한다. 무릎이 건들 건들거리지만 저녁에 술 한잔하고 자야겠다.

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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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 서기지부 교선부장





식당외주화 저지와 인력감축 철회를 내걸고 안전운행투쟁을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투쟁은 지속되고 있으나, 식당관련 교섭은 중단되었고, 열차지연은 미미한 수준이다. 수색지구에서 펼쳐진 안전운행투쟁은 단협을 앞두고 일종의 전초전이자 대리전의 양상을 띄었다. 사측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였고, 때문에 투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아직까지 어느 쪽도 물러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해결은 요원하고 기 싸움만 팽팽한 형국이다.


안전운행투쟁의 한계

작년 파업 전야제를 전후로 수색지구의 안전운행투쟁은 매우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측은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올해 수색지구의 안전운행투쟁은 이전과는 달랐다. 초반부터 사측은 안전운행투쟁을 막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고소고발, 직위해제, 휴대폰을 통한 협박, 지사 및 본사관리자들의 검수원에 대한 대인밀착마크 등등... 결과적으로 수색지구 조합원들은 모든 탄압을 감내하며 버텼다. 그러나 아직도 돌파구는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쉽지만 작년과 같은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 떼를 지어 구내를 배회하는 사측 관리자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봉지구에서도 안전운행투쟁에 돌입했고, 성북지구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천막이 펼쳐졌으며, 천막을 걷어내기 위해 사측은 혈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철도의 본질이 모든 조합원에게 까발려졌고, 전국적으로 조합원들의 투쟁의식은 고양되었다. 또한 새롭게 얻은 것도 있다. 단협투쟁을 앞둔 상황에서 철도노조의 투쟁일정을 살펴보면, 6월 중순부터 전국 안전운행투쟁이 예정되어 있다. 아니 실제로 현장에 배치된 투쟁은 사실상 안전운행투쟁뿐이다. 만일 이대로 진행된다면 09년 단협투쟁은 6월에 실시되는 안전운행투쟁의 승패에 따라 좌우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안전운행투쟁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이 뼈아픈 교훈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5월부터 수색지구가 진행한 안전운행투쟁의 가장 큰 성과이다. 일종의 본고사를 앞두고 치룬 예비모의고사인 셈이다. 만일 본고사에서도 꿋꿋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면? 출제자가 바뀌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큰 기대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수색지구 안전운행투쟁을 사측이 어떻게 대응하고 탄압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이후 전국 안전운행투쟁을 진행함에 있어 미약하나 작은 참고가 되길 바라며...


진화된 대응, 밀어내기 신공

  5월 1일 사측은 안전운행투쟁에 대비하여 미리 조성된 열차를 신촌과 서울, 용산역에 배치하였다. 해당 열차의 승무원은 기관차만 출고하여 각 역에서 객차와 연결 후 바로 발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평소 입환이 없던 신촌과 같은 역은 갑자기 늘어난 입환으로 인하여 부하가 걸리기 시작하였고, 역의 특성상 부득이하게 본선지장 입환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보니 안전운행투쟁과 무관하게 열차는 스스로 꼬이기 시작했다. 자충수!

  투쟁 초기 고소고발과 직위해제를 남발하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같이 지사와 본사의 관리자들을 총동원하여 수색지구를 휘젓고 다니던 상황은 사측의 불안감의 표현이 아니었겠는가? 이때만 하더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승무원의 운용부터 열차취급까지 어디서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줄줄이 무너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측은 여유를 되찾았고 영민하게 대응했다. 새로운 전술이 개발되었다. 밀어내기 신공! 신촌과 서울역에 2대의 비상대기열차를 갖다놓고 수색에서 조성된 열차가 늦는 경우 비상대기 열차를 보내고, 수색에서 늦은 열차는 다시 비상대기로 채워넣는 방식으로 줄줄이 열차를 밀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이번 안전운행투쟁의 백미를 장식했다. 수색에서 발차하지 않는 열차가 이미 서울역에서 발차하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관제실 열차시각 임의로 조정, 목숨 걸고 승무하라?

  하지만 덕분에 승무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열차번호가 변경되어 행로도 모른 채 승무를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바뀐 열차번호를 부여받고 시간표도 없어 기관사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진다. 또한 북쪽홈 대기실에는 자신을 구매해줄 주인을 기다리는 일일용역마냥 휴대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비상대기승무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결코 열차를 늦추지 않겠다는 사측의 일념 때문에 비정상적인 열차운용에 따른 모든 불편함은 승무원들에게 전가된다. 규정도 법도 필요없다. 관제실의 지시하나로 모든 의문과 항의는 일축된다. 동력차승무원근무기준은 무시된 지 오래이다. 관제실은 본인들 마음대로 수색발 단행열차의 발차시각을 앞당겨놓고 왜 승무원들이 지연출고를 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관제실 마음대로 발차시각을 앞당기다보니 심지어 수색 합숙에서 취침 후 새벽에 일어나 편승을 가야하는 승무원들의 경우 편승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3층 합숙에서 인터폰 소리 듣고 일어나자마자 후다닥 옷을 입고 창문을 열어 편승열차의 기관차번호를 확인하고 달리는 열차에 과감하게 뛰어내려 타야만 지정된 열차로 편승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5월 1일 관제실의 지시로 동력차승무원근무기준을 무시한 채 조정된 열차의 발차시각 비교표이다.



휴일근로 거부 투쟁의 병행

  서울기관차는 6월 3일부터 전면적인 휴일근로, 연장근로 거부투쟁에 돌입했다. 5월에 비해 미할당이 적은 수준이긴 하나, 사업소의 과장들은 차 타기에 바빴고, 매일같이 전 열차에 첨승하며 승무원들을 감시하던 행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측은 다시 공세적인 대응을 펼쳤다. 타 사업소의 과장들을 충당하는 대신 서울기관차의 과장들이 첨승을 타며 지부임원들과의 신경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기관차에는 4명이 탑승한다. 기관사, 부기관사, 과장, 지부임원.
  소강상태를 보이던 안전운행투쟁은 휴일거부투쟁이 진행되고, 현장의 관리자들이 심기일전하면서 다시금 불이 붙는 양상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아라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허풍선이가 예전에 자신이 로두스라는 섬에서 엄청나게 높이 뛰었다고 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가 로두스섬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서 뛰어보아라.”

  수색지구 모의고사를 통해 우리의 약점은 노출되었다. 동시에 사측의 대응전략도 파악되었다. 돌파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객관적 지평이다. 후퇴하지 않으나 뚫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 결국 평이한 수준의 안전운행투쟁으로는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연 돌파구는 없는가?

  어쩌면 안전운행투쟁은 국을 끓일 때 기본 바탕이 되는 육수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 육수 위에서 갖은 양념과 야채와 고기를 썰어 넣어야 맛있는 국을 끓일 수 있을 것이다. 철도노조를 포함한 철도의 모든 조합원들은 이제 피해갈 수 없는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단협투쟁 승리로 가는 첫 번째 길목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과 정면으로 대결해야만 한다. 자,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아직 전국적인 수준의, 전직종의 안전운행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전국적인 수준의 휴일근로거부투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공사가 주구장창 호도하는 진짜 태업은 해보지도 않았다.

자, 수색지구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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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AX 400, 필름스캔





사진, 글 김찬봉 |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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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힘차게 타오르던 촛불 이후 MB정권은 얼마나 촛불들이 두려웠는지 아예 대한민국을 경찰공화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말이면 서울시내에 시커먼 경찰들이 공안정국 분위기를 연출하고, 촛불만 들고 있어도 길을 막고 마구잡이로 연행하며 완벽한 치안을 자랑했습니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시청광장을 봉쇄하기 위해 빙 둘러싼 전경차벽은 정부의 신경질이 길게 늘어선 줄이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에는 “사무라이 조”라고 불리는 조경감이 장봉을 휘두르는 동영상이 유포되며 이른바 “전경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숨 막히는 시대, 더 이상 탈출구는 없어보였습니다.민주노총은 집회에 참가해도 언제나 칼퇴근하는 만두노총 아저씨들이 되어버렸고, 촛불들은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에만 의존하며전망 없는 투쟁을 지속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속에서 차분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드리자는 약속된 일주일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이제 국면은 전환되었고, 다시금 전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후퇴되는 것을 우려하며, 서울대를 시작으로 1200명이 넘는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고, 통일운동의 원로 강희남 목사는 “리명박을 내치자”며 스스로 시대의 불길 속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6.10항쟁 22주년을 맞아 전국에서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청소년들도 6.10에 맞춰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집단정리해고에 저항하는 쌍용차노조는 평택공장에 스스로를 가두고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故 박종태 열사를 잃은 화물연대 또한 8일 오후 3시부터 간부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했고, 11일 전면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수색지구는 현재 40일이 넘는 안전운행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수색지구의 안전운행투쟁은 단협을 앞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허철도와 철도노조 대립의 축소판이자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한 달 사이에 공사의 모든 탄압을 수색지구가 두들겨 맞으며 버티고 싸웠습니다. 6월 22일부터 전국적인 안전운행투쟁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진짜 본 싸움에 돌입할 것입니다. 수색지구 모든 조합원들과 이에 연대하여 투쟁한 철도노조의 모든 조합원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자, 이제 반격입니다.
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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