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수 | 조합원






88년, 21년 전이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올림픽을 치루고 우리나라가 재도약 하는 해로 기억하겠지만 실제로는 지독한 패배주의와 낙담으로 시작된 한 해였다. 한 해전인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사회가 낡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사슬을 벗고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미래로 전진할 수 있다는 희망에 넘쳐있던 해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력적 통치에 맨몸으로 저항하며 거리를 뒤엎었던 학생들과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거대한 파도가 되었었다. 그러나 이런 민중들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사람들은 결국 정치인들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위기감을 느낀 수구 세력은 역사를 되돌리려고 집요하게 저항했고 야당 정치인들은 분열했으며 노동자, 시민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진보적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불린 87년 6월 항쟁은 80년 광주학살의 파트너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수많은 시민들은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확정에 좌절했고 88년 취임식을 보면서 허탈해 했으며 희망이란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야말로 스타였다. 폭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거대한 전국적, 전세대적 저항조차 아무 쓸모없다는 패배의식의 바다 속에서 불빛을 비추는 등대가 하나 있었으니 노무현 국회의원이었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재벌 총수에 설설기는 파렴치한 국회의원들 속에서 당당하게 호통치는 노무현을 통해 시민들은 몇 년 묵은 채증이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언제나 통치의 대상이고 동원의 대상이었던, 단 한 번도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민들에게 오랜만에 정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다. 노무현의 인기는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반 민중성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었다. 당시 여중생들까지도 노무현 아저씨의 카리스마에 환호했던 일들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는데 한반도를 뒤덮었던 노무현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패배의식의 바다 속에서
불빛을 비추는 등대가 하나 있었으니


  노무현은 한국의 정당정치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철옹성같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성공지상주의, 철저한 위계질서와 권력에 대한 추종 및 복종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특히 한국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꾀하는 세력들은 보수정당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당활동이 원천봉쇄된 상황에서 시민들의 진보적, 민주적 지향을 정치적으로 담보할 수 없었다. 결국 민중들의 열망은 보수 야당의 정책으로 굴절되어 수렴되었는데 그나마 이 보수 야당에서 상대적 진보성을 갖는 사람들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었던 미국, 또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공개적 반대가 현실화 되었던 86년 5.3인천사태도 그 발단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인천 지구당 현판식이었다. 주안역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진압경찰과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제축출, 파쇼타도라는 구호아래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한 시위를 보수언론은 야당의 지구당 행사를 빌미로 한 좌경용공세력의 국가전복음모로 규정햇다. 이 시위의 배후조종혐의로 현 한나라당의 실세로 꼽히는 이재오전 의원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처럼 민중의 실질적 이해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없는 불운한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에서 그나마 보수야당의 벽을 깨고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 노무현이다.

  한국의 정치사는 이합집산의 역사였다. 어제까지 가졌던 신념을 오늘 헌 신짝처럼 버리는게 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 온갖 구차한 핑계를 대며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 했다. 군사독재정권과 사생결단으로 대치하던 사람들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독재정권에 투항했다. 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의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하던 김영삼이 계파 정치인을 이끌고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을 때 한 사람 목청 높여 반대를 외쳤던 이가 있었으니 노무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 마다 노무현은 스스로가 계란이 되어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모두가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무모한 도전이라 일컫는 일에 스스럼없이 몸을 던졌다. 한나라당 일색인 경상도에 지역감정을 깨겠다고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가? 결국 계속되는 실패는 노무현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주는 기름진 거름이 되었다. 마침내 미친 노무현의 진심이 국민들에게 미치게 된 것이다.


노무현후보의 당선은 시대정신의 승리였고
한국사회의 한걸음 진전을 약속하는 의미있는 발걸음

  87년도부터 이른바 진보진영은 독자적으로 후보를 냈다. 진보진영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가치조차 발견할 수 없는 군사독재정권과 그 전통을 물려받은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이 한국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대립하고 있는 민주당으로 통칭되는 야당역시 국민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사수에 국민의 이름을 도용하는 세력으로 보고 진정으로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에 나서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정치권 진출은 반공주의의 덧칠과 지역주의의 완고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제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커나가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진보진영의 정책에 동의하더라도 실제 투표에서는 사표방지 심리나 비판적 지지라는 명분아래 차악을 선택하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진보진영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내세워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후보로 나선 노무현은  그 전의 어떤 후보보다도 진보진영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비록 보수야당의 후보지만 상대적 진보성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고 인간적 매력조차도 진보진영의 후보를 능가했다. 또한 대통령 출마 선언과 민주당내의 경선과정, 대통령 선거운동기간 전반에 걸쳐 마치 한편의 감동적 드라마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공신화를 연출해 냈다. 후보 경선과정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하고, 후보 결정 후 지지율 하락에 따른 후보교체론에 휘둘리다가 막판 정몽준과의 통합과 분열이라는 손에 땀을 쥐는 시나리오 속에서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던 사람의 상당수가 막판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기자회견을 보면서 위기감 속에 노무현으로 투표했다. 끝까지 진보후보 권영길을 지지하겠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한나라당 지원군이라는 노골적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한국 사회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으로 한 없이 부풀어 올랐다. 진보후보를 찍었든 노무현 후보를 찍었든 간에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시대정신의 승리였고 한국사회의 한걸음 진전을 약속하는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공적인 산업부분조차도 자본의 영역으로 포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에 감히 공공성을 이야기 하며 사유화중단을 선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이며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노무현 당선의 효과는 당장 철도에서 가시화 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철도 민영화에 대해서 국가기간산업인 네트워크 산업에 대한 섣부른 민영화는 중단한다는 방침이 대통령인수위에서부터 발표되었다. 민영화만이 살길이라며 철도구조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철도산업의 사유화를 추진했던 건교부는 쓰디쓴 일보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교부는 새로운 반격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는데 이것이 바로 철도구조개혁법이었다. 2003년 4월20일 철도노사는 파업돌입을 앞두고 합의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내용이 “철도개혁은 철도의 공공성을 감안하여 기존 민영화 방침을 철회하고 대안을 모색한다.”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앞의 내용은 이미 인수위부터 이야기 되어온 것이었지만 정부와 노동조합 간에 명문화된 합의서 양식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이윤확보를 위해 기존 국가가 담당했던 공적인 산업부분조차도 자본의 영역으로 포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시대에 감히 공공성을 이야기 하며 사유화중단을 선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이며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건교부는 착실하게 철도노조에 반격을 준비했고 청와대에 벽을 쌓아 소통을 막았다. 6월 철도산업 구조개혁법안을 강행처리하게 되면서 결국 철도노사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명백한 420합의의 파기였다.



  420합의서의 “철도개혁은 철도노조 등 이해당사자와의 충분한 논의와 공청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한다는” 내용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일방적 법안처리로 철도파업을 유도한 건교부의 행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의 기대가 무너지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정부부처 기자들이 출입처를 상대로 시쳇말로 어디가 더 막강한 기득권을 갖고 강한 파워를 내느냐를 따지며 마피아란 표현을 쓴다. 가장 커다란 파워를 가진 곳은 역시 돈을 다루는 부처이나 건교부마피아나 교육부 마피아 등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켜내는데 탁월한 부처도 알짜베기 부처로 손꼽힌다. 결국 노무현의 실패는 이들 정부부처 권력기관의 마피아적 특권을 무장해제 시키지 못한데서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탈 권위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눈에 띄는 검찰이나 국정원등의 권력기관에 집중 되었지 수십 년간의 이권유지를 통한 자가발전의 정부부처 탈권위화에는 미쳐 손을 쓸 수 없었다.

  철도노동자가 노무현에게 실망했다면 노무현은 철도노동자에게 실망했다. 철도노동조합이 요구하는 민영화반대도 합의해 주고, 여러 가지 내용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경청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막 출범한 정권이 제자리도 잡기 전에 국가기간산업망인 철도를 마비시키는 행위는 대공장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의 전형이라고 본 것이다. 철도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서민의 정부라고 하는 참여정부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폭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며 노무현이라고 별거 없다며 정권에 대한 실망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거 철도 해고자가 발생하고 손해배상이 청구되는 모습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철회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교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철도 개혁의 방해자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확대재생산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실패 가림막으로 삼으면서 철도의 공공성 강화노력을 무산시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철도는 여러모로 아쉬운 한 해였다.


노무현의 불행



  “반미면 어때”라는 신조를 표명했던 노무현대통령에 대해 미국을 어버이 모국으로 모시는 수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극단적 공포는 극단적 공격성향으로 나타나듯이 보수진영은 노무현에 대해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전 대통령과 특별히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었지만 무리(?)없이 미국의 요구에 응해주었고 결국 이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자존심 상하는 논리로 옹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자 과오는 한미FTA체결이다. 미국이 다급하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신념을 갖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한미FTA는 자본과 수구세력의 입장에서는 미운 노무현이 그래도 제대로 한 일중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고 농민과 서민,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끝내 민중을 배신하고 신자유주의에 홀딱 벗어준 최악의 정책이자 용서할 수 없는 과오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한미FTA추진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노무현대통령 집권시기에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세상을 끝까지 지배할 것 같은 환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출신 일변도의 경제학자와 경제부처의 상상력이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전제조건 없이는 한 치도 발휘될 수 없는 반쪽짜리였다.

  과거 일제시대에 한 동안 항일운동에 열심히 매진했던 사람들이 변신을 거듭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에 대해 해방 후 인터뷰에서 왜 그랬나 이유를 물어본즉 이들의 대답은 이랬다. “일본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무모한 독립운동 보다는 영원한 제국에 협력해 식민지일지언정 조선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키는게 좋지 않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기가 질렸던 것이 아닌가?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대두되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전도사들조차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에 반성하는 지금의 시대정신이 조금이라도 노무현대통령의 집권기간에 투영되었더라면 FTA라는 다자간 무역협상을 통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하급지위로 한국경제를 편입시키는 오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 가는 길



언어의 거꾸러짐이 일반화된 이명박 시대.

공기업 선진화? - 공기업 사기업에 팔어 먹기!
산업합리화? - 노동자 집단해고!
사교육대책? - 무한경쟁 몰입시키기!
4대강 살리기? - 운하로 강죽이기!
합리적 세금조정? - 부자들 세금 깍아 주기!
실용적 대북정책? - 개성공단 폐쇄위기, 전쟁위협 증가!
전직대통령 극진예우? - 국세청, 검찰 동원해서 전직 대통령 조지기!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삼성비리를 밝힌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애써 입을 막아버린 검찰이 술 취해 앞좌석 의자를 발로 차 항공기에서 쫓겨난 전력이 있는 상식이하의 인간 박연차의 말은 토씨하나 안 빼고 월드컵 중계 방송하듯 공표했다. 조중동은 신나게 지면을 채우며 저주의 악다구니를 퍼부어댔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 였다. 국민들이여 찍 소리 말고 통치를 받아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살아라. 어떻게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도 쓸데없는 일이다. 노무현 같은 인간도 이렇게 박살나지 않느냐?
  피지배자의 가장 큰 덕목은 지배자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피지배자로 태어난 몸. 자유를 원하는 자! 고통만이 너의 몫이다!
  결국 노무현은 또 다시 계란이 되길 작정했다. 이 끔찍한 세계, 한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지배계급의 질서에 도전했다가는 가차없이 린치를 당하는 세계에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 되는 세상에서 바보 노무현은 바위로 날았다.

  추모기간 내내 대한문 앞 분향소의 추모공간과 서울시청 앞 광장을 막은 경찰버스는 이 시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자화상이었다. 공포에 질린 정권의 초라한 모습과 슬픔을 삭이며 무관심 했던 자신에게 자책하는 시민들의 앙다문 입과 대비되며 역사의 또 한걸음 진전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영결식 길에 수십만의 인파속을 서서히 빠져 나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은 눈물만이 흐른 길은 아니었다. 이 탐욕의 시대에 사람이 숨쉬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겠다는 다짐의 길이요 함께 싸우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속죄의 길이요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약속의 길이며 축제의 길이었다. 이 축제의 길에 잠시 누르던 카메라 셔터를 멈추고 영구차에 손지장을 찍었다.
 
  작은 불꽃을 일으켜준 인간 노무현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PS. 국가권력이란 공평무사하게 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지만 결국은 지배계급의 이해를 실현하는 장치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노무현은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그 공과가 어떻든 국가권력의 작동 시스템 속에서 고군분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소통공간에 과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진보정권이었나”를 되물었다고 한다.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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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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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02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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